어릴 적엔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목욕탕에 갔었다. 한동네에서 같이 자란 친구들이니 부끄러워 몸을 가리는 일도 없이 까르르 대며 서로의 등을 밀어주었다. 눈이 오는 날 목욕탕에 나와서 친구들과 마셨던 요구르트와 바나나우유의 추억이 몸에 새겨져 있는지, 함박눈에 들뜰 일이 없어진 지금이지만 차가운 공기에도 시원했던 개운함이 생각난다.
내가 사는 동네엔 재래시장이 가까이 있어 오래된 목욕탕들이 몇 군데 있다. 장도 볼 겸 시장과 가장 가까운 목욕탕으로 찾아갔다. 건물의 지하로 내려가니 엘리베이터 바로 앞에 카운터가 있었다. 카운터 옆회색문엔 여탕이라는 빨간색 고딕체 간판이 붙어져 있었고 남탕은 한층 더 아래라는 표시로 가다가 꺾인 빨간 화살표가 아래계단을 가리키고 있었다.
카운터엔 꽃무늬 밍크담요를 덮고 자고 있는 주인백이 누워있고, 유리장 테이블 위엔 락커키가 시장 좌판에 깔려 있는 것처럼 20개 정도 늘어져 있었다. 알아서 아무 번호나 가져가서 쓰고,나갈 때 알아서 놓고 가는 번호선택이 가능한 셀프방식이었다. 잠자는 분을 깨우는 게 멋쩍어"저기요"라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그때 단골인듯한 손님이 여탕으로 들어가면서 "어이" 하고 부르자 주인은 천천히 상반신만 일어나 몸을 돌리며 계산을 하라는 듯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락커키 옆엔 수건들이 포개져 있었고 선택할 수 있지만 선택한들 위칸인지 아랫칸인지, 위치 좋은 락커가 어디인 줄 모르니 그냥 아무거나 집어 들고 그 옆에 있는 수건도 한 장 챙겼다.
목욕탕 안쪽은 오랜 세월 동안 동네사람들이 왔다 갔다 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시골 할머니네에 가면 버리지 않아 구석구석 쌓여있는 물건들이 있다. 매년 가도 그 자리 그대로 있는 할머니네 풍경처럼 목욕탕에는 빈틈없이 목욕바구니들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단골들이 놓고 다니는 목욕바구니는 옷장 위를 다 채우고, 좁은 에어컨 위에도 채워지자 더 좁은 냉장고 위에도 올려져 있었다. 있는 빈틈을 모두 채운 바구니들이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더 이상 들어갈 바구니자리는 없어 보이지만 어떻게든 자리를 만들어서라도 올려놓고야 말겠다는 바구니들의 행렬들에서 억척스러움이 느껴졌다. 목욕탕에 같이 온 손녀가 할머니 쉽게 찾으라고 매직으로 써놓은 듯한, '채원할머니'라는 삐뚤 글씨가 바구니에 크게 쓰여있었다.
작은 공간 안에는 락커를 치운 자리에 만든듯한 마사지 공간도 있었다. 입구 옆 이층 행거에는 화려한 무늬들로 가득한 속옷과 조끼, 티셔츠, 바지도 빼곡히 채워져 있어 칸막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 매대에는 때타월등 목욕용품들이 나열되어 있지만, 그곳 매대에는 각종 원액들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매실, 오미자, 홍초, 석류병들이 진열되어 있고 카페처럼 음료를 주문하는 곳이었다. 얼음을 넣은 플라스틱통에 빨대를 꽂아 탕에 갖고 들어갈 수 있게 세팅해 주었다.
탕에 들어가 의자와 세숫대야를 챙겨 자리를 잡았다. 정말, 내가 가본 목욕탕 중 가장 청소가 안된 곳이었다. 아니, 청소가 필요 없다는 자신감들은 여기저기 지우지 않은 찌든 때들이 말하고 있었다. 청소하는 손이 대충 지나가다 만 경계선들은 확연히 두드러졌다. 벽면의 타일 사이사이는 온전하게 흰색을 유지하는 줄눈이 없었다. 염색금지라고 안내가 붙어져 있으나 말을 듣지 않는 단골손님들이 남긴 염색의 흔적들은 벽면 곳곳에 튀어 갈색 흑색등이 흩뿌려 지나가며 수많은 점을 이루고 있었다.
세숫대야의 안쪽 둘레에는 목성의 띠처럼 둥글게 때를 이루고 있었고, 벽면에는 여러 번 자리를 옮긴 샤워기의 못자국들이 그대로 구멍나 있었다. 샤워기 호스에도 청소의 손이 지나가다 말아서 씻겨나가지 않은 곰팡이들은 살았다는 쾌감과 함께 언제 쓸려나갈지 모르는 긴장감 속에 하루하루를 호스사이에서 버티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곰팡이들에게 자리를 잡아도 되니 안심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앉은자리만이라도 청소하고 싶은 충동이 샘솟았지만, 나의 목적은 묵은 겨울 때를 밀고 뜨끈한 탕에 오랫동안 몸을 쉬는 것이니 비위 좋은 마음으로 청결함은 내려놓기로 했다. 그러나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조용히 목욕을 즐기고 싶은 나의 바람은 시끄러운 수다들의 울림들에 묻히고 말았다. 청소를 안 해도 되는 그 목욕탕의 유지 비결은 정기적으로 탕에 모여드는 중, 장년 단골 여성들에게 있었다. 오늘 이 목욕탕에서 모임을 하기로 한 건지, 아니면 우연한 일상들이 자연스러운 듯,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여성들은 탕에 있는 사람들과 하나같이 서로 인사를 했다. 목, 팔, 손가락엔 금으로 된 액세서리가 반짝였다. 마사지 실에서 바로 부앙을 마치고 들어온 흔적을 동글동글 등에 새긴 채 등장했으며, 오늘 쉬는 날이냐며 인사도 건네고 탕에 들어와 식혜를 마시며 이야기를 한다. 목욕탕 위치가 재래시장 근처이니 일을 하고 목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을 테고, 주변에 오래된 빌라들이 있는 동네다 보니 서로 알고 지낸 세월과 친분이 있다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수도꼭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는데, 한분이 나를 향해 혼잣말을 했다. "찬물을 틀어놓으면 어떻게"
내가 틀어놓은 것도 아닌데 비키라는 듯이 나를 넘어가며 수도꼭지의 물을 조절했다. 텃새란 이런 것인가. 대부분 탕 속의 수도꼭지는 함부로 만지지 않는다. 하지만 마치 자신의 탕구역에 이방인이 들어와 탕 물을 망친듯한 말투는 날카로웠다. 자신은 단골이며 타일에 묵은 흔적들이 보이냐고, 내가 한 짓이라며 으스대는듯했다.
말을 하는 사람은 모르지만, 목욕탕 안에서의 듣는 사람의 소리는 울림으로 전달된다. 내 귀엔 우왕우왕 하는 소리뿐. 다시 한번 나는 예민하지 않은 사람처럼 시끄러운 울림들을 들으며 탕목욕을 즐겼다. 온탕과 냉탕에는 처음 보는 물체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보일러 기계 크기이며 "물대포, 뱃살제거"라고 쓰여있었다. 도대체 물대포는 어디서 나오는 건지 궁금해서 이리저리 관찰해 보았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것인지, 아무도 물대포를 작동하는 이는 없었다. 뱃살을 물대포로 제거해야 한다면 나는 그냥 데리고 살고 싶을 만큼 물대포라는 말이 공포스럽고 뱃살이 측은했다.
온탕에서 반신욕을 하고 자리에 앉아 양손에 이태리타월을 끼고 다시는 이 목욕탕을 오지 않을 것처럼 열심히 때를 밀었다. 묵은 겨울 각질들이 길쭉길쭉한 지우개 가루처럼 변신하면 꽤 만족스럽다. 목욕탕까지 갔는데 때를 밀어 안 나오는 건만큼 서운한 건 없다. 여유롭게 탕 속에서 음료를 마시며 친목을 다지고 있는 분들이 대부분이고 하필 때를 미는 사람이 나 밖에 없었다. 나의 때를 누가 볼까 봐 여러 번 물을 끼얹어 가며 흘려보냈다. 개운함의 끝판왕, 냉탕에서 수영하며 왔다 갔다 마무리를 하고 탕에서 나왔다.
선풍기는 작동이 안 되고 드라이기는 있는데, 동전을 넣어야만 사용할 수 있단다. 200원어치 온풍으로 머리를 말리고 서둘러 챙겨 나왔다. 나가는 입구에 커다랗게 써놓은 안내문대로 락커 열쇠는 집에 가져가지 않고 매대에 있는 열쇠 무더기 위에올려놓았다. 오래된 엘리베이터 입구 앞에서 버튼불이 안 보여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 몰라 망설이는 나를 보더니 주인백은 얼른 타라고 답답한 듯 소리를 질렀다.
지상으로 나오니 아직도 눈이 오고 있었다. 나는 이 목욕탕에 다시는 올일이 없을듯하니 한번 뒤돌아본 후, 소복한 눈을 천천히 밟고 방금 감은 머리의 향기를 맡으며 바나나우유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