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수영은 매번 같은 번호 앞에서 손을 멈춘다. 이름은 이미 지웠고, 숫자만 남았는데도, 배열은 늘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통화 버튼을 누르지도, 삭제 버튼을 선택하지도 못한 채 화면을 닫는 일이 어느새 하루 일부가 되었다. 열차가 선로를 긁는 쇳소리가 귀 안쪽을 얇게 스치고 지나간다. 화면을 끄고도 손끝에는 미세한 진동이 남아 있다.
회사에 도착하면 공기는 늘 건조하고 희다. 형광등 아래 회색 책상들은 젖은 콘크리트처럼 무표정하게 늘어서 있다. 벽에 붙은 안전 점검 일정표가 눈에 걸리고, ‘인원 부족’이라는 문장이 빨간 펜으로 두 번 덧칠돼 있다. 회의에서는 문장이 잠깐 언급되지만, 누구도 거기서 말을 멈추지 않는다. 말들이 지나가고 나면 일정만 남고, 남은 것은 늘 사람의 몫이다.
수혁은 지하철 승강장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서 있는 바로 뒤편, 안전문 안쪽은 늘 어둡고 바람이 얇게 통과하는 곳이었다. 원래는 두 사람이 함께해야 하는 작업이라고 그는 여러 번 말했다. 작업 전마다 장갑을 고쳐 끼고 문틈을 손으로 한 번 더 짚는 습관이 있었다. 반복된 동작이 그를 지켜주는 약속처럼 보였고,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사고 전날 밤, 수혁은 말수가 적었다. “여름이라 작업복이 금방 젖는다.”라는 말로 웃으려 했지만 웃음은 짧고 목소리는 낮았다. 점검만 끝나면 바로 오겠다고 했고, 저녁에 결혼식장 계약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수영은 “그래, 빨리 와”라고 대답하며 캘린더 알림을 확인했다. 전화가 끊긴 뒤에도 ‘바로’라는 단어가 귀에 남아 오래 서성였다.
그날 아침, 현관 앞에서 수혁은 신발 끈을 고쳐 맸다. 수영은 문 옆에 서서 그의 등을 보고 있었고 괜히 옷깃을 한 번 더 매만졌다. “다녀올게.”라는 말은 평소보다 짧았고 문이 닫히는 소리는 이상하게 길게 울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 나는 둔탁한 소리와 닮아서 수영은 잠깐 눈을 감았다. 짧은 찰나에 스친 불길함을 출근 시간의 예민함이라고 눌러두었다.
사고 소식은 오후에 왔다. “지하철 안전문 점검 중 추락”이라는 빨간 글씨가 몇 번이고 반복되었고, 말끝은 늘 “조사 중”으로 닫혔다. 통화를 끝낸 뒤에도 기계음 같은 울림이 귓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안전문이 닫힐 때 나는 둔한 ‘텅’ 소리가 머릿속에서 되풀이되며 숨을 자꾸 끊어놓았다. 몸은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마음은 바닥이 없는 곳을 계속 디뎠다.
장례식장 복도는 꽃 냄새가 지나치게 달았다. 사람들은 “많이 놀랐겠다.”라는 말을 같은 속도로 반복했고 수영은 고개만 끄덕였다. 유골함 앞에서는 말이 더 단순해졌다. “괜찮아.”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질 때마다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핑계처럼 바닥에 바스러졌다. 수영은 그 단어를 주워 올려 다시 입에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며칠 뒤, 수혁의 형이 형사라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누군가는 “형이 가만있지 않더라.”라고 말했고 그 한마디가 공기 속에서 무게를 가졌다. 현장 기록이 다시 열리고 근무표가 다시 펼쳐졌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찬영이 형사 고발될 예정이라는 말도 그때 함께 흘러왔다.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는 말이 덧붙었지만, 그 문장은 다른 말들보다 유난히 천천히 가라앉았다.
결국 수영은 알게 되었다. 그날 현장에는 수혁 혼자였고 찬영은 덥다며 근처 카페로 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점검 끝나면 연락하라.”는 말이 누군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가 곧 작아졌고 “그냥 잠깐.”이라는 말로 덮였다. 수영은 카페가 어디쯤인지, 그 시간에 햇빛이 어느 창으로 들어오는지까지 상상하게 되었다. 땀에 젖은 작업복과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같은 장면 안에 놓이는 상상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았다.
사람들은 사건이 정리되면 괜찮아질 거라고 말했다. 회사는 이미 문을 닫았고 책임은 곧 가려질 거라고 했다. 수영은 그 말들이 유리 벽 너머에서 울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어떤 결말도 수혁을 되돌리지 못한다는 사실만 또렷해졌다. 수영은 ‘이후’를 상상하지 않으려 했다.
퇴근길, 승강장에 서서 안전문을 바라본다. 문 위로 흐르는 주황색 안내 등이 잠깐 깜빡이고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고정된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오늘은 유난히 둔하게 들리고 그 소리에 맞춰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내려앉는다. 사람들은 줄을 맞춰 서고 수영도 그사이에 섞인다. 하지만 시선은 자꾸만 문틈으로 향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휴대전화를 꺼낸다. 연락처에서 수혁의 번호를 누르고 삭제 버튼 위에서 손이 멈춘다. ‘삭제’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빛나며 시선을 붙잡는다. 번호를 지우면 수혁이 아니라 수영 자신이 지워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날 “빨리 와”라고 말해버린 입술까지, 문이 닫히는 소리를 이상하다고 느끼고도 넘겨버린 감각까지 함께 사라질 것 같기 때문이다.
수영은 결국 삭제하지 않는다. 통화 버튼도 누르지 않는다. 다만 숫자 위에 손가락을 올려두고 한 번도 걸지 못한 전화의 무게를 확인한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화면을 닫는다. 아직도 번호를 지우지 못한 이유는 수혁을 붙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영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점검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오늘도 스스로 확인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