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리기 직전 우리가 겹쳤다

by 꿈담은나현


자동문이 열리기 직전, 투명한 유리에 비친 얼굴이 잠깐 흔들렸다. 얼굴은 오래 잠들어 있던 기억을 건드리듯 조용히 번졌다. 엘리베이터 안은 저녁의 흰빛으로 가득했고, 형광등 아래에서 혜성의 얼굴은 하루를 숨기지 못했다. 옅은 화장 위로 남은 피로가 눈가에 고여 있었고, 그늘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귀 뒤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예전에는 누군가의 손이 먼저 다가오던 순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문득 떠올렸다.


‘띵.’ 문이 열리자 차가운 공기가 발목을 스쳤다. 겨울과 봄이 뒤섞인 냄새였다. 끝나지 않은 계절과 막 시작된 계절이 같은 자리에 서서 서로를 밀어내지 못하는 공기였다. 혜성은 그 공기를 밟으며 지하로 향했다. 퇴근길은 늘 같은 동선, 같은 속도로 반복되었고, 변하지 않는 길을 걷는 동안 삶도 그렇게 안정된 모양을 갖추었다. 흔들리지 않는 대신, 쉽게 기울지도 않는 형태로.


회사에서의 하루는 늘 비슷했다. 회의실의 회색 벽은 감정을 삼키는 스펀지 같았고, 서류 위에 내려앉은 형광빛은 생각을 평평하게 눌러 놓았다. 커피 머신은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소리를 반복했고, 동료들은 적당히 친절했으며 상사는 필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대기업은 아니었지만, 숨이 막히지 않는 자리였다. 혜성은 그 안에서 무리하지 않는 법을 배웠고,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줄어든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어릴 적, 집은 자주 조용했다. 어느 날, 엄마는 나오지 않았고, 신발장에 있던 구두 한 켤레가 사라진 상태였다. 식탁 위에는 밥 두 공기만 놓였고,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혜성도 묻지 않았다. 질문은 그날 집 안에서 가장 먼저 사라졌고, 대신 침묵이 자리를 차지했다. 집은 갑자기 넓어졌고, 빈자리는 소리 없이 커졌다.


그날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혜성은 한동안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엄마의 신발이 놓이던 자리를 계속 바라보다가 신발도 벗지 못한 채 울음을 터뜨렸다. 소리를 내면 안 될 것 같아서 울음은 목 안쪽으로만 쌓였고, 숨은 끊기듯 이어졌다. 작은 몸이 접힌 채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울음은 갈 곳을 잃은 물처럼 흘러나왔다. 혜성은 그날 처음으로 슬픔이 마음보다 먼저 몸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방문을 닫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울던 시간은 낮인데도 밤처럼 길었다. 이불 속은 어두웠고, 그 안에서는 아무도 자신을 보지 못할 거라 믿었다. 엄마가 돌아왔을 때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울음이 멎고 나자, 속이 텅 빈 느낌만 남았고, 그 공허함은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혜성은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는 위로가 아니라 공백이 남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배웠다.


그 뒤로 혜성은 아빠와 단둘이 살았다. 저녁마다 국을 데우는 소리와 뉴스 앵커의 낮은 목소리, 방문 너머의 기침 소리가 하루의 끝을 알려주었다. 혜성은 혼자 머리를 묶는 법을 익혔고, 외투 단추를 끝까지 잠그는 습관을 들였다.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기보다 자신을 먼저 챙기는 쪽을 선택했다. 그렇게 자라난 시간은 조용했지만 단단했다.


무너질 때도 있었다. 이유 없이 짜증이 쌓이던 날들과 방문을 닫고 울던 밤들이 반복되었지만, 그때마다 주변의 손들이 혜성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담임의 짧은 한마디, 친구 엄마가 건네준 따뜻한 밥, 말없이 등을 두드리던 이웃의 손. 혜성은 그 손들 덕분에 붙잡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갔다. 기대하지 않는 대신, 버텨내는 쪽으로.


지하철역 통로 끝에서 자동문 앞에 섰다. 개찰구 쪽의 소음은 파도처럼 일렁였고, 자동문 앞에서는 그 소리가 갑자기 잠잠해졌다. 문은 닫혀 있었고 유리는 잠시 거울이 되었다. 그 위로 낯선 얼굴 하나가 겹쳐 올라왔다. 혜성은 본 적 없는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자동문이 열리기 직전, 시선이 마주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눈을 피할 틈도 없이 상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려다 실패한 사람처럼, 그 시선은 잠깐 머뭇거렸다. 혜성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묻지 않는 데 익숙한 사람답게, 고개를 아주 조금 숙인 채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문이 열리자, 사람들의 흐름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혜성은 그 안에 섞여 지나갔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선택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동문 앞에 남은 여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갈 곳을 잃은 눈동자가 이미 멀어지고 있는 혜성의 뒷모습을 놓지 못한 채 따라가고 있었다. 문이 닫히는 동안에도, 그 시선은 쉽게 거두어지지 않았다.


센서가 낮게 울렸다. 문은 다시 닫혔고, 유리에는 아무 얼굴도 남지 않았다. 혜성은 개찰구를 지나며 잠시 숨을 골랐다. 방금의 장면이 뒤늦게 가슴안으로 밀려들었다. 가슴 어딘가가 늦게 닫힌 문처럼 천천히 따라왔다.

문은 닫혔다. 혜성은 지나쳤다. 그러나 그날 이후, 그녀는 닫힌 자동문 앞에서만 자꾸 멈춰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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