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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보너부리 Aug 07. 2023

내가 선택하고, 내가 망하기

 나와 동생에게는 나름 큰 사건으로 기억된 일들을 엄마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때가 있다. 성적이 반에서 20등이나 떨어졌던 일, 연예인 콘서트에 줄을 서느라 하룻밤 집에 들어오지 않은 일, 다른 집에서는 두고두고 이야기할 일들도 ‘그런 일이 있었어? 나는 모르겠는데.’ 하신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부터 내가 대학 입학할 때까지의 기억이 거의 없단다. 무언가 바쁘게 산 기억은 있지만, 특정한 사건은 기억하기 힘드시다고.


 새벽 다섯 시, 이른 기상을 하셔서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드신다. 나물과 밑반찬, 국 하나. 우리가 중간에 먹을 간단한 간식을 준비하고, 출근하신다. 몇 달은 중식당, 또 몇 달은 횟집, 몇 달은 한식집. 친척들의 도움으로 경제적으로 그나마 안정되기 전 몇 년 동안을, 식당의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반찬을 만드셨다. 가끔 단기로 일당이 센 농사일을 돕기도 하셨다. 아홉 시, 집으로 돌아오셔서는 밀린 살림을 하시고 쓰러지듯 주무셨다. 


 잔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다. 학창 시절에도 ‘그런 친구 사귀지 마라. 반대로 공부를 잘하는 친구를 사귀어라. 공부 좀 해라. 책을 읽어라.’라는 보통의 자식이라면 흔히 듣는 잔소리들을 전혀 하신 적이 없다. 내가 아이를 낳고 나서야 ‘아직 어리니, 심하게 혼내지 마라.’ 정도의 말씀이 유일한 잔소리려나? 김 여사 본인의 의지로 하지 않으셨다기보다는 간신히 그 시기를 버티느라 잔소리조차 할 여유가 없으셨겠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에게서 ‘엄마의 공부하라.’는 잔소리 때문에 힘들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드라마가 아닌 실제로 그런 엄마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하고, 반갑기까지 했다.


 20년 전 사춘기 소녀에게도, 고민하고, 선택해야 할 일들은 많았다. 엄마에게 부담이 될까 우리가 묻지 않았을 뿐, 엄마도 우리도 서로에게 질문 없이 결과를 통보하는 일이 점차 익숙하고, 당연해졌다. 


  소풍에 갈 때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 생리대는 어떤 것을 사용해야 할까?, 어떤 고등학교에 입학할까? 동아리는 어떤 걸 들어야 할까? 문과? 이과?, 대학은 어떤 지역에 있는 대학, 어떤 과로 선택할까? 새로운 반에서 어떤 친구를 사귀어야 할까?, 친구와 싸운 후에는 관계를 지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사귀자고 하는 남자인 친구한테는 어떤 방식으로 거절하는 것이 현명할까?, 좋아하는 오빠가 여자친구가 있다면, 고백을 할까? 말까? 


  시간을 내어 기꺼이 대화를 나누어 줄 좋은 선생님들, 착한 친구들, 따스한 어른들이 주변에 있었지만, 도움을 청하는 방법도 청해도 괜찮다는 것을 몰랐다.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검색창도, 유튜브도 없던 시절이었다.

  다큐멘터리에서 보육원에서 자라 갓 사회에 나온 자립 청년들의 삶을 다룬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처음 직장에 들어가 동료의 부모님 장례식장에 가서 조의금을 어느 정도 내야 하는지 몰라 한참 헤맸다고, 주변의 어른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우지 못해 난감한 상황. 그 장면을 보며 내가 저랬구나 하고 알게 되었다. 살면서 소소하게 부딪혔던 작은 어려움들은 보통의 아이들은 부모나 주변의 어른들을 통해 배우는 것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한 번에 끝날 일을 여러 번 시도하거나 시작도 못하는 일들이 있었다.


  내가 의지할 사람은 결국 나였다. 항상 내 마음이 끌리는 방향을 알기 위해 고심했다. 

 스물넷 겨울, 시험을 앞두고, 시험일 며칠 전까지 두 지역 중에 도무지 고를 수가 없어 김 여사에게 전화를 드린 적이 있다. 


  “네 인생인데, 네가 선택해야지.”

  “엄마, 그러다 망하면, 어떡해?”

  

“그럼, 네가 택하고 네가 망해야지. 열심히 했어도 망할 수 있지. 대신 떨어지더라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


  엄마는 나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 같다가도,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정확히 짚을 때가 있다. 어떤 선택지를 고르더라도 마지막에 책임지는 사람은 나여야 한다. 끝까지 고민하고, 스스로 선택해야 후회가 없다. 촌스럽게도 나는 그런 인간이었다. ‘내가 선택했는데 어떡해? 내가 망해야지. 그게 맞는 일이지.’ 인생의 나름 큰 결정 앞에서 엄마도 본인의 생각을 말씀하셨지만, 끝에는 딸의 결정을 따라주신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겠다 말씀드렸을 때, 엄마는 월세나 생활비를 매달 보내주기 어려울 것 같다며 근처 국립대를 추천하셨다. 하지만 너가 간다면 방법을 찾아보겠다 하셨다. 더 멀리 가보고 싶었다. 언젠가 다시 돌아오더라도, 서울이라는 장소가 주는 매력을 경험하고 싶었다. 선생님들께서 방법을 찾아주셨다. 우리 지역에서 서울로 대학을 간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초생활수급자 가정에서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을 지원받았다.


  보통 청년들은 고등학교 때 공부를 열심히 하고, 대학 때 낭만을 누린다고 한다. 기숙사에서 버티기 위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엄격한 기숙사 규정을 따라야 했다. 학기마다 4.0 밑으로 떨어지지 않게 성적을 관리하고, 매일 11시 30분이라는 입실 시간을 지켰다. 그 덕에 졸업할 때까지 기숙사에 머물 수 있었다. 덤으로 조기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직장의 선택도,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망해도 네가 망해라.’를 덧붙이면서도 엄마는 늘 내 뜻에 따라주셨다.


 여전히 나는 나 자신을 설득하는 일이 어렵다. 과정이 고통스럽더라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 그래서 후회하지 않을 길을 골라야 한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만 미래의 자신이 ‘내가 왜? 이걸 시작했지, 그만둘까? 했을 때, 그 마음을 누를 수 있다. 


 온갖 선택지들로 늘 시끄럽지만, 선택의 순간만큼은 ‘온 마음’이 고요하다. ‘반성은 하더라도, 후회는 하지 않기.’ 그래야 다음 과정으로 나아가는 길을 감당할 수 있다. 


 가르치는 학생들이 가끔 선생님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 부럽다고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한다. 


 ‘부자도 아니고, 예쁘지도 않고, 딱히 능력도 없는 놈이 뭔 자신감이 넘치냐고? 오롯이 내가 선택한 일을 스스로 책임지려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지.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는데, 왜 그렇게 사냐고? 내가 알잖아?’

 

나는 지금도 늘 망할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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