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웅의 저서 '최소한의 이웃이' 란 책을 읽다가, 순간 우리는 왜 서로 미워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과 억울한 감정이 들었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것' 은 한국에서 살아가기 위한 필수 생활 법률이다. 그런 법률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마치 법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무의식이 있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란 일종의 배려이다. '내가 저런 일을 당하면 기분 나쁘겠지, 그러니 배려해야지.' 배려란 그런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배려란 의미가 퇴색된 것을 하고 있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위를 하면 나쁜 것이 되어버린다. 가령, 시끄러운 그러나 우렁찬 배기음을 내며 시내 한 가운데 자신의 존재를 떵떵거리는 오토바이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 '저 사람은 왜 이리 남에게 피해를 줘.' 나쁘다는 생각을 한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 배려가 아닌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세상은 점점 척박해지고 있다. 서로 간의 정보다는 미움이 깊어지고, 공익보다는 사익, 타인을 위하는 마음보다는 자신을 위하는 마음이 커지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생각하면, 간단한 답이 나온다. 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되돌아볼 시간을 가지고, 생각할 시간을 갖는다. 그러나 그럴 시간이 어딨겠는가. 당장 내게 가시 돋힌 말을 쏟아내는 직장 상사에 치인 마음을 달래주는 시간 밖에 없는데. 남들에게 뒤쳐지는 것만 같아, 힘겨운 발걸음을 하나씩 앞으로 내딛을 시간 밖에 없는데. 여기서 여유가 있다는 것은 돈이 많다는 것이 아니다. 조급하지 않고 편안하며 지신을 돌아볼 수 있는, 아침에 지저귀는 새소리에 잠시 몸을 맡길 수 있는, 그런 여유를 말한다. 돈이 많더라도 여유가 없으며, 돈이 적더라도 여유가 있을 수 있다.
세상이 척박한 이유는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만든 것은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을 만든 것은 도시 한가운데 시끄러운 배기음을 울리는 오토바이 운전자가 아니다. 그것을 만든 것은 조용한 카페에서 큰 목소리로 대화하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여유가 없어진 이유를 정치인의 부정부패, 교육 방식, 잘못된 정부의 정책, 세계 경제의 혼란, 등 수많은 요인으로 대답할 수 있지만, 그것은 대답할 수도 없으며 크게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확실하고 중요한 사실은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만든 것은 아니란 것이다.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당장 내 심기를 건드리는 저 사람들에 화가 나는데, 그것을 억누르고 살 수는 없지 않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는 여유를 찾을 수 있을까? 내가 여유를 가지고 싶어도, 세상이 나를 그렇게 두지 않는다. 나는 아직, 그에 대한 답은 모르겠다. 만약 내게 돈이 많았더라면 나의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모아 집단 지성을 이뤄 조그마한 나비의 날갯짓을 일으키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의 최선을 한다.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를 먹을 때도 버스를 타고 내릴 때도 카페에서 음료를 시켜먹을 때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한다.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다.
배려가 마치 법이 되어 나쁜 짓이 되어버린, 그들의 행동보다 더 나쁜 것들이 세상에 수도 없이 많지만, 배려를 하지 않는 다는 이유로 나쁜 짓이 되어버린다는 것이 정말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