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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햇살 Mar 09. 2023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없는 나라

두드려야 열리는 문



처음 캐나다에 왔을 때, 이민생활 선배들에게 들었던 수많은 조언들 중에서도 꽤 인상적이었던 말이 바로 '캐나다는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없는 나라야.'라는 것이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땐 뭐든지 직접 해봐야 결과를 알 수 있다는 의미겠거니 생각했다. 그 뜻을 머리로는 알 것 같아도 여전히 그 말의 무게가 와닿지 않아서 알쏭달쏭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 후 이곳에서의 삶, 10년 이상의 시간들을 지나 실제로 그 의미를 알게 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캐나다에 처음 도착해서 거리를 걷다 보면 사람들이 참 친절하다고 느껴진다. 길에서도 상점에서도 모르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웃으며 'Hello.'하고 인사해 주는 나라. 줄 서있는 앞사람에게 옷이 예쁘다고 칭찬이라도 하면, 스몰토크라는 말이 무색하게 '어제 엄마의 남자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옷'이라는 사적인 이야기도 서슴없이 하는 나라. 한국과는 다른 이런 모습이 문화 충격이기도 하면서 '이 나라 사람들은 참 친절하고 오픈되어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캐나다에 조금 더 살며 여러 가지 공적, 사적 서비스를 이용하다 보면 참 아이러니하게도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불친절할 수가 있나 싶어 진다.  레스토랑의 서버를 '저기요!' 하며 부를 수 없고 하염없이 와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며, 상점의 점원들은 내가 물건을 사든 반품을 하든 더 친절하지도 덜 친절하지도 않다. 병원에 가서 이름이 불릴 때까지 오래 기다려 의사를 만나면 타이레놀 먹으라며 그냥 보내기 일쑤고, 정부에 신청한 서류는 아무리 기다려도 감감무소식이다. 친절하고 빠른 서비스, '고객이 갑'이 되는 서비스에 당연한 듯 길들여진 한국 사람들에겐 이런 캐나다의 서비스가 한없이 불친절한 데다 느리고 답답하며, 내 돈 내고 내가 받는 데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없는 상황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카페 천국인 나라에서 온 한국사람들은 손님이 몰리는 시간, 캐나다 카페의 직원들이 한없이 여유롭게 주문을 받는 모습에 놀라곤 한다. 주문하려고 늘어선 줄이 아무리 길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님과 안부를 주고받으며, 음료를 주문받으면 뒤돌아 만들어서 들려 보낸 후에 다음사람의 주문을 받는다. 틈틈이 옆 직원과 사담도 나누며 음료를 만들고 내어주고 다시 주문받고 하다 보면 긴 줄은 도무지 줄어들 줄을 모르고, 그런 상황에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기다리는 모습이 오히려 신기하다. 주문받는 사람은 착착착 주문만 받고 만드는 사람은 만들기만 해서 탁탁탁 내어주는 효율적인 분업에 익숙한 우리에겐 캐나다의 이런 방식이 참 융통성도 없고 일머리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뿐인가. 상점에 가서 광고지에 세일하는 상품이 어디 있는지 물으면 50%의 확률로 그 상품이 없다고 한다. 없는 상품을 광고하는 게 믿기지 않아 내가 직접 찾아보면 신기하게도 버젓이 전시되어 있는 경우가 반이다. 가져가서 말하면 그저 어깨 한 번 으쓱할 뿐. 그러니 성질 급한 놈은 기다리다 숨 넘어가고, 말 안 되는 상황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은 쌈닭 되기 십상인 것이다.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캐나다에 살면 살수록 속병이 나는 대신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진다. 익숙해지고 나면 레스토랑에서 '저기요.'하고 외치는 대신 서버가 다가와 줄 때까지 느긋하게 대화하며 기다리는 게 당연해지고, 공공기관에 가서 처리할 일은 미리미리 계획을 짜서 넉넉히 여유를 두고 하게 된다. 카페에서 줄이 아무리 길어도 조바심 없이 직원과 인사를 나누며 주문을 하게 되고, 내 순서에 딱 만들어 내어 주는 커피를 마시는 게 어쩐지 특별히 케어받는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무엇보다, 일단 기다림이 익숙해지면 그다음은 안 되는 걸 되게 하는 지혜도 배우게 된다.


한 친구가 기가 막히게 정의하길 '캐나다는 내가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나라'라고 했다. 타국인 캐나다에서 살다 보면 모르는 것투성이고, 언어 때문에 움츠려 들고, '카더라'하는 말들은 무수하며, 그래서 지레 안 될 것 같아 포기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렇게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나라가 캐나다이다. 하지만 살다 보니 알게 되었다. 그게 무엇이든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가서 알아보면, 어떻게든 해답을 찾고자 하는 상황 속으로 뛰어들면 또 안 되는 게 없는 나라가 이 나라 이기도 하다. 모르는 건 오래 걸리고 복잡해도 직접 전화하거나 찾아가서 담장자에게 물어보고, 영어가 달려도 용기를 내서 상황을 설명하고, 안될 것 같아도 진정성 있게 어필하면 안 되는 것도 되는 나라. 마치 두드려야만 열리게 설계된 문 같다. '직접 가서 두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이 나라에서 '안 되는 걸 되게 하는 지혜'인 것이다.


많은 한국 이민자들이 이력서를 100개 이상 쓰기 전에는 취업이 안될 거라고 했지만, 남편은 구인광고 100개가 뜨기를 기다리는 대신, 이력서를 들고 원하는 회사에 세 번 버스를 갈아타고 찾아가서 혹시 직원을 채용하는지 물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인터뷰를 본 후 취업이 되었다. 나의 경우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돈과 상관없이 봉사하며 열심히 하다 보니 나를 신뢰해 주는 이들이 생기고 기대하고 있지 않던 순간에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우리 부부가 사규에 명시되지 않은 급작스런 장기휴가를 떠나야 했을 때 사규에는 없었지만 왜 꼭 필요한 휴가인지를 설명하니 양쪽 직장 모두 이해해 주었다. 대학에서 휴학이 인정 안 되는 코스를 들었지만, 관계자와 상담을 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증명하니 이 또한 되게 해 주었다.  아는 동생은 취업하자마자 주택융자를 받고 싶어서 앞으로 10년 안에 자신의 자산가치가 엄청나질 것임을 프레젠테이션으로 준비한 후 은행의 모기지 담당자를 설득하고 사회생활 시작하자마자 목돈도 없이 집을 샀다. 사소하게는 물었을 때 세일품목이 매장에 없다고 들어도 샅샅이 찾아보면 나오는 경우가 많고, 안 되는 경우는 메니져를 불러 말하면 rain check(나중에 그 상품이 입고되었을 때 세일 가격으로 살 수 있게 해주는 노트)이라도 발급해 준다.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없는 나라, 그런 사회 시스템'의 배경에는 내 할 일은 각자 알아서 하는 '개인주의'와 '사람'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바탕이 되어있다고 생각한다. 서비스를 소비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제공하는 사람도 중요하기에, 내가 서비스업에서 일한다고 해서 '을'이 아니고 소비자라고 해서 '갑'이 아니다. 과잉 친절하지 않으며 내 업무가 아닌 일은 고객이 요청해도 열심히 하지 않는다. 반면 카페에서 주문받는 자리는 주문뿐 아니라 손님과의 대화도 내 업무라 생각하기에 아무리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도 개의치 않는다. 회사의 이익은 나랑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다. 웬만한 인력충원은 내부직원에게 물어 믿을만한 사람을 추천받고 이뤄지기에 구인공고에 안 뜬다고 해서 채용계획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공채의 경우 해당 분야에서 얼마나 꾸준히 봉사했는가가 채용에 중요한 요소이며, 이력서에는 반드시 나의 경력과 장점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의 연락처를 적고 대부분 전화로 사실확인을 한다.




도무지 방법이 없어 보여도, 남들이 아니라 해도, 내가 잘하는 일을 찾아 열심히 하다 보면 기회가 오는 나라. 어찌하면 더 빨리 효율적으로 공동의 문제를 해결할까 보다는 내 책임을 다 하는 것이 우선인 문화. 열리지 않는 문도 열심히 두드리고 문지기에게 들어가야 하는 이유를 설득하면 문이 열리기도 하는 곳. 기회가 기회를 만들고 모든 기회는 사람과 사람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이 가장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회. 참 융통성 없으면서도 두드리면 가능한 것투성이고, 참 사람이 우선인 것 같으면서도 내 책임이 아닌 것은 책임지지 않는 나라. 그렇게 이상하면서 흥미로운 모습, 내 고향과는 참 다른 그것이 12년 차 이방인의 눈에 비친 캐나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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