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어르신들 프로그램이 내 맘에 들어왔다.
우리 가족에게 명절의 루틴은 항상 같다.
명절 전날 12시경에 본가를 방문해 점심, 저녁을 먹고, 명절 당일 아침, 점심을 먹은 후 처가로 떠난다.
처가에서는 명절 당일 저녁을 먹고, 명절 다음날 세끼를 먹고 집으로 복귀를 하던지, 아니면 그다음 날 점심 정도까지 먹고 집으로 복귀를 하던지 하는 것 같다.
우리 가정보다 더 힘든 일정을 소화하는 가족도 있겠지만, 주변에 당일로 한 끼 정도만 먹고 오는 동료나 친구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보면, 나름 힘든 일정을 소화하는 듯도 싶다.
물론.. 내가 힘든 것은 없다.
양가 모두 우리 집을 기준으로 40분 정도 거리에 있고, 양가 부모님 댁 사이의 거리는 차로 20분 정도밖에 안 되기에 운전 때문에 힘든 것은 없고, 양가 방문 시 내가 하는 유일한 일은 가족들(주로 양가의 아버님들이시다.)과 같이 TV를 보다가, “식사하세요~”란 소리에 맞춰 식탁으로 걸어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집에서처럼 와이프와 같이 음식을 만들거나 보조 주방장이 되어 도와도 좋고, 설거지를 해도 나는 전혀 상관없으나, 본가에서 그런 행동을 했다가는 어머니에게 며느리가 좋은 소리를 들을 리 없기에 도와주지 않고 (와이프도 주방에 오지 말라고 한다.), 처가에서는 한 번 설거지를 하겠다고 했다가 장모님이 깜짝 놀라 거실로 가라고 하시는 바람에 더더욱 내 할 일은 없다.
나에게 명절에 가장 힘든 것은..
아마도 양가의 부모님들과 함께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일인 것 같다.
물론 TV를 보는 동안에도 핸드폰으로 틈틈이 다른 것을 보기는 하지만, 그래도 부모님을 뵈러 온 명절에 계속 핸드폰을 본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것 같아, 가급적 부모님들이 틀어 놓으신 TV를 함께 보려고 노력하는데… 비슷한 취양의 양가 부모님이 보시는 프로그램이 나와는 잘 맞지 않는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전원일기’ (어머니들 취향)
요새는 좀 뜸하지만 그래도 한 때는 매일 보시던 ‘나는 자연인이다’ (아버지들 취향)
종편에서 방송되는 ‘각종 뉴스나 토론’ (아버지들 취향)
몇 년 전부터 대세인 미스터 & 미스 트롯 출연자들의 ‘트로트 대잔치(?) 같은 프로그램’ (부모님들 공동 취향)
전국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동네를 소개하고, 음식을 소개하는 ‘최불암의 한국인의 밥상’과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부모님들 공동취향)
TV채널을 여기저기 돌려도 이 프로그램들은 끝이 나질 않고, 여러 방송사에서 끊임없이 재방에 재방이 되어 나온다.
TV 앞에 앉은 아이들은 1분 만에 흥미를 잃고, 어딘가로 사라져 자기들끼리 킥킥대며 놀고 있다.
와이프는 본가에서는 이것저것 하느라 맘 편히 쉬지를 못하나 처가에 와서는 피곤하다며 방에 누워 잠을 자고 있다.
아버님들은 TV를 틀어 놓으신 채 햇볕에 조는 새처럼 꾸벅꾸벅 소파에서 주무시다가, 내가 TV를 다른 채널로 돌리기라도 하면 잠에서 번뜩 깨어나셔서 잠시 내가 돌린 채널을 보시는 듯하다가 리모컨을 가지고 가서 본인이 원하시는 채널로 돌리고선 다시 2-3분이 지나면 주무신다. (몇 번 반복되다 보니, 아예 리모컨을 돌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어머님들은 나는 일도 관심 없는 전원일기의 배우들이나 트로트 가수들의 배경이 어떻고, 어떤 어려운 일들을 겪었고, 이 사람들은 근황은 어떻고.. 를 끊임없이 말씀하신다. 음.. 누구에게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다.
분명 눈은 TV를 보고 있는데, 내 정신은 안드로메다 어디로 인가를 떠 다니고 있다.
아마도… 1-2년 전부터였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노인들만 보는 프로그램이라 생각한, 위의 프로그램 들 중 일부가 나의 감정에 와닿기 시작함이 느껴졌다.
최불암 & 김영철 님이 나오는 여러 지역을 돌며, 동네와 음식 등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물론 집에서 그 프로그램을 찾아보거나 하는 것은 절대 아니고, 내 의지로는 틀 생각을 안 하는 프로그램들이긴 하지만, 양가를 방문해 멍 때리고 TV화면을 보던 중, 어느 순간부터 해당 프로그램들이 내 마음속 어딘가를 간질간질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사람 사는 모습들을 보여주는 것이 왜 그렇게 정감이 가고, 나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지…
어느 바닷가 마을 편인가에서 동네에 있는 한 집을 찾아갔는데, 아주머니가 큰 냄비에 끓고 있는 국을, 큰 국자로 퍼서 진행자에게 주고, 진행자는 맛이 어떻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옛날 생각이 난다며 맛있게 먹는데… 그 모습을 보니 ‘와.. 진짜 맛있겠다. 저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고 싶다.’라며 감정이입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러고 나서 든 감정은?
‘우 씨.. 뭐야? 이걸 보며 감동받고 있다고?’
하며 뭔가 당혹감에 빠졌던 것 같다.
왠지 어르신들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에게 와닿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이 프로그램이 와닿는다.
사람들의 실제 삶.. 다양한 인간들의 군상.. 늙어감의 여유.. 추억에 빠지게 만드는 정감 있는 시장과 골목…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달라진 것인지,
최근 2년여의 기간 동안 내 삶의 가치관이 바뀌었기 때문인지,
어떤 것이 더 큰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으나, 과거에는 보이지 않았던 다양한 사람들의 삶이 이제는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보다 나에게 더 감동적이다.
그리고 그 장면을 같이 보며 자연스럽게 양가 부모님들과 대화를 하는 나를 발견한다.
이러다가 전원일기까지 보고 향수를 느끼는 지경이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은 있으나, 조금씩 변해가는 내 감정이 낯설기는 하지만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다.
아니, 솔직히 새로운 감정이 하나 더 들어온 느낌이어서 오히려 좋다.
P.S. 하지만 아직까지 근래 최고의 대세인 트로트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이들의 영향이 크기 때문이라 생각이 되는데, 트로트보다는 태어나 한 번도 제대로 들어본 적 없는 아이돌 가수들의 노래가 요즘은 더 흥겹게 들린다. 아이브의 노래는 연습해 본 적도 없건만, 집에서 아이들이 하루 몇 번씩, 몇 달을 듣는 것을 함께 듣다 보니, 노래방 가서 완창이 가능한 지경이 되었다.
내 안에 ‘늙음으로 가는 감정’과 ‘젊음으로 가는 감정’이 모두 존재하는 것 같은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