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계는 없다. 순수한 사랑만 있을 뿐

유교녀, 쓴맛을 보다.

by 어쩌다 초등교사

난 내가 그렇게 유교주의적인 줄 몰랐다. 난 그런 구태한 전통사상에 얽매이지 않은, 깨어 있는 여자이다. 더구나 난, 예전에 미국 유학 생활도 하면서 외국물도 먹었다. 난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내가 유교적이란 걸 이제야 깨닫고 보니, 이런 도도함이 나를 더욱더 헷갈리게 했고, 더욱더 아리게 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 아이들은 정말 정말 자유롭고 어른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그냥 똑같은 사람이다. 나이 먹은 사람, 나이 적은 사람.


여긴 선생님만의 멋진 등받이 의자가 없다. 사고 싶으면 내 사비로 충당해야 하기에 나도 아이들이랑 같은 의자에 앉아 지낸다. 그런데 아이들이 내 자리에 와서 내 의자에 너무도 당연하게 떡 앉아있다. 그래서 가르쳤다. 여긴 내 구역이니 이 의자는 건드리지 말라고. 그래도 가끔 또 가서 앉고 어쩔 땐 내 의자를 끌고 가기도 한다. 그러지 말라고 하니, 왜 그래야 하냐고 오히려 해맑게 물어본다. 그런데 내가 적절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내 물건도 잘 만진다. 그건 따끔히 가르쳤다. 내 personal belonging에는 손대지 말라고.


소풍 갈 때도 고생하시는 선생님 음료수라도 하나 건네는 따뜻한 아이가 없다. Chaperone (소풍에 도와주러 온 어른) 도 데리고 다니는 아이들에겐 시원한 아이스크림 하나씩 쫙 돌리는데, 옆에 같이 있는 선생님한테는 하나 드시겠냐 묻지도 않는다. 괜히 뻘쭘해진다.


심지어 상장을 받을 때도 한 손으로 휙 받는다. 교장 선생님한테 받아도 한 손으로 휙 받을 뿐이다. 열심히 해 줘서 고맙다고 오히려 교장선생님이 아이에게 인사한다.


내가 맛있어 보이는 걸 먹으면 자기에게도 좀 달라고 한다. 뜬금없이 도서관에 간다거나 화장실에 간다고 해서 안된다고 하면 왜 그러냐며 오히려 되묻는다. 본인 기준에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으면 교사에게 계속 되묻는다. 한국적 시각으론 딱 말대꾸이다.


가끔 내가 큰 소리를 내면 오히려 소리 지르지 말라며 나에게 사나운 표정으로 응수한다. 이건 사춘기에 자아를 찾아가는 중학생이 하는 전형적인 행동이다. 그런데 초등학교 3학년의 행동이 이러하다.


여기 애들은 인사도 안 한다. 차라리 복도에서 만나는 다른 반 애들은 아는 척 '하이' 하거나, 반가우면 허그를 하는데, 우리 반 애들은 아침에 와서 나를 봐도 특별한 거 없는 듯 인사를 안 한다. 등교할 때 교실에 들어오면서 선생님이랑 눈 마주치면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던 한국 아이들은 정말 예의 바른 천사이다. 그땐 고개 까딱도 안 하고 '안냐세요~' 라며 들릴 동 말동 대강 말하는 애들이 예의 없다고 느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저 아는 척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고등학교 다니는 우리 애들 친구들도 인사를 안 한다. 내가 인사를 하면 화답은 해 준다. 참 어이없다.


그러고 보니 여긴 인사교육이라는 게 딱히 없는 듯하다. 도덕교과가 없으니, 예의 교육은 순전히 가정교육인데, 인사를 중시하며 꾸준히 가르치는 미국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는지 모르겠다.


한 술 더 떠서, 여기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Thank you를 엄청 많이 한다. 줄 잘 서면 땡큐, 집중하면 땡큐, 과제를 제출하면 땡큐. '잘했어' 하고 칭찬하는 게 아니라 고맙다라니.. 그런데, 지금은 나도 땡큐세례에 동참하고 있다. 말로만 땡큐가 아니라 정말 고마운 마음이 든다. 쓰레기 잘 갖다 버리면 땡큐, 알림장 다 쓰면 땡큐, 그저 말썽 안 부리고 규칙만 잘 따르면 땡큐다.


학기말 파티 때는 더 가관이다. 엄마들은 별별 아이들이 좋아하는 불량식품을 아낌없이 보내어 학급 공용 테이블 위에 그득하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위해 알록달록한 솜사탕도 준비해 놓고, 초콜릿 분수랑 마시멜로로 분위기도 잔뜩 올려놓고, 아이스크림에 딸키, 초코 토핑을 얹어 나눠주기도 한다.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주변 모든 어른들이 듬뿍듬뿍 표현해 준다.


물론 사랑하고 예뻐하는 게 전부는 아니다. 엄격할 땐 또 장난이 아니다. 이는 또 다른 글에서 다루려 한다.


예전의 X세대로서 유교는 진즉 벗어났다고 생각했으나 큰 착각이었다. 난 아직도 아이들에게 인사를 기대하고 있었고, 잘하는 아이들에게는 칭찬을 했다. 아이들은 사랑받기 위해서 대단히 뭘 잘할 필요가 없다. 그렇기에 잘했어, 못했어 평가하지 않는다. 규칙을 잘 따르고 하루하루 건강하게 커가는 그 자체가 그저 감사할 뿐이다. 유교 때를 막 벗길 땐 쓰리고 아팠는데, 보들보들한 새로운 살결 느낌이 나쁘지 않다. 토닥토닥... 적응하느라 애썼다! Dr. Lee 수고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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