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최고의 파트너였어

J과장님

by 싱클레어

나쁜 사람들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그만할까 고민했던 수많은 순간들을 견뎌내고 만난 2024년의 초입, 나는 마케팅 부서로 내부 인사이동이 났다. 마트 근무 중 가장 잘했던 일 중 하나였다. 회사에서도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를 처음 만난 시간이었으니까.

2023년의 나는 어두움으로 얼룩져 있었다면, 2024년엔 내 인생에도 희미한 빛이 들어왔다. 바로 같이 일하게 된 과장님이었다. 이미 1년을 마케팅팀에서 근무했던 과장님 두 명 중 한 분이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났고, 그 빈자리에 내가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엔 2023년의 여파로 기죽어있던 나에게 다른 부서 발령도 크게 설레는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다 똑같겠지, 라는 생각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만난 과장님을 편의상 J과장님이라 부르겠다. J과장님은 꽤 성격이 털털하고 뒤끝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긴 했는데, 실제로 대화를 나눠본 건 업무적으로 마주친 한 두 번이 다였다. 앞으로 같이 일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내향적인 내 성격에 괜찮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기가 죽을 대로 죽은 나는 그 당시 정말 어떤 것에도 자신감이 없는 상태였다. 그런 나의 모습을 과장님도 봤던걸까.

J과장님은 워낙에 낯을 가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오히려 낯을 많이 가렸던 건 나였다. 그런 내게 과장님은 밥을 사주면서 나의 경계심을 풀어갔던 것 같다. 워낙 정이 많고 손이 크신 분이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4명의 팀원을 본인 사비를 들여서 자주 맛집(진짜 맛집이었다)에 데려갔고, 맛있는 음식은 꼭 나에게 나누어주었다. 아침마다 계란, 고구마 등 여러 가지를 싸와서 꼭 먹였고, 오히려 안 먹는다고 하면 잘 먹어야 한다며 추궁을 하던 분이셨다. 그런 나에게 과장님은 점점 엄마같은 존재가 되어갔다. ‘밥’, ‘음식 나눠주기’ 이런 모든 사소한 마음들이 쌓여 얼어붙었던 내 마음을 녹이는 것 같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처음 배우는 마케팅 업무라 한 번 작은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는지 어떤 실수였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2023년도에 조그만 실수라도 하면 나는 쓰레기같은 사람이 되는것이라고 잘못 배운 나는 그 실수를 한 날도 겁을 먹은 토끼처럼 자책을 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하루를 살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마트에서 근무를 하면서 처음으로, 따뜻한 말을 들었다. J과장님의 말씀이었다. “누구나 실수는 하는거야. 쫄지마. 진짜 잘하고 있어.” 가족이 아닌, 남자친구가 아닌 회사의 누군가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한 건 처음이었다. 1년동안 나는 인신공격을 당하거나, 조그만 실수에도 비난을 당하기 일쑤였는데, 처음으로 J과장님은 나에게 햇살같은 말을 해주셨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차갑고 무거운 눈 속을 걷는데, 문득 따스한 햇살이 내 머리 위로 찬란하게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 후에도 과장님은 1년 내내, 내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꼭 돌려서 말해주는 것 같았다.

“네가 본사에 가면 정말 똑소리나게 잘할텐데. 네가 얼마나 일을 잘하는데!”

“넌 어딜가든 무얼하든 잘할거야. 지금도 잘하니까.”

나는 따뜻한 말들의 힘을 J과장님을 통해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라’ 라는 뻔한 구절의 힘을 직접 경험하니 나는 그 말 한마디가 누군가를 살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과장님의 말들은 나에게 정말로 ‘힘’을 줬고, 회사생활에 조금씩 적응하며, 내가 오히려 전보다 일을 실수 없이 더 잘하게 만들어 주었다. 과장님이 나에게 하는 그 말들은 실제로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게 했다. 내가, 직접, 나를 그렇게 만들어 갔다.

그리고 2025년이 된 지금, J과장님은 나와 같은 마트에서 일하고 있지 않다. 그 분은 인사발령이 나서 다른 마트로 가셨다. 가는 날까지도 나에게 “너랑 함께 일해서 내가 정말 편했어. 넌 최고의 파트너였어. 다음에 꼭 보자. 그리고 내년엔 꼭 본사로 가서 일을 더 잘 배우면 넌 정말 높이 올라갈거야.”라고 하셨던 J과장님. 그녀는 나에게 참 고마운 존재였고, 어쩌면 나에겐 귀인이었다. 아마 J과장님이 없었다면, 나는 마트를 진작에 떠났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일 때문에 힘든 건 버텨도, 사람 때문에 힘든 건 못 버틴다는 것. 하지만 사람 한 명이 나에게 주었던 따뜻하고 끊임없던 위로와 애정은 시들어있던 내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 수 있게 해주었다.

지금 상황이 힘들고 지옥같아도 누구에게나 희망은 여러 가지 형태를 한 채로 나타나는 것 같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생을 살아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 희망이 나에겐 J과장님이라는 형태로 나타났고, 앞으로 남은 내 인생에서 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불편함과 어려움을 피하고 두려워하지 않으려 한다. 맞서고 싸우고 이겨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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