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머리가 좋은 아이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영재로 선발되어 매주 다른 학교 아이들과 함께 경북 과학 영재 수업을 들었다. 일주일 중 유일하게 일찍 하교하던 수요일에 추가로 공부해야 한다는 것에 불만을 늘어놓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엄마는 내 IQ가 높다는 것을 어디서나 자주 말했다. 내가 수학 경시대회에서 상을 타거나 과학전람회에서 국회의원상을 받아오면 일과 가사노동에 지쳐 항상 그늘졌던 엄마의 얼굴이 환해지곤 했다. 엄마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기뻤다.
책 읽기에 재미를 붙인 나는 언제부턴가 학교 공부보다 책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엄마는 성적이 떨어져도 혼내거나 눈치를 주지 않았다. 엄마와 역사나 정치. 사회에 대해 한바탕 대화를 나누고 잠드는 날이면, 우리 딸은 모르는 게 없다고 누군가에게 내 자랑을 늘어놓던 엄마의 목소리가 방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더 이상 엄마의 기쁨이 아니게 됐다. 똑똑한 나를 최고의 자랑으로 여기던 엄마는 내가 성인이 된 후 ‘여자가 너무 많이 알면 남자들이 싫어한다’ 라거나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의 말이 불쾌했으나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줄곧 보고 들어왔던 이상적인 여성상이 바로 그런 것이었으므로.
당차고 씩씩하지만 어딘가 약간 부족한 여성과 그런 여성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남자. 이런 남녀관계는 여전히 한국 드라마에 적용되는 강한 클리셰다. 드라마에서 덜렁대거나 가끔 무식하기까지 한 여성의 모습에 남성들은 귀여움을 느낀다. 국민적 사랑을 받았던 드라마 <응답하라> 모든 시리즈의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의 관계, 시트콤 <하이킥> 시리지의 서민정-최민용. 황정음-최다니엘 등이 그것이다. 이런 관계의 사랑은 유쾌하면서도 안정적인 구도로 그려진다. 마치 주어진 성 역할인 것처럼.
이러한 클리셰로 인해 여성은 실수가 잦아서 남성의 도움이 필요한 부차적 존재로 시청자들에게 주입된다. 각종 미디어에서 전파되는 내용은 현실에서 하나의 이념처럼 작동하곤 하는데, 어리석고 멍청하다는 뜻의 백치(白癡)와 아름다움(美)의 기괴한 합성어인 백치미가 대표적인 예다. 백치미가 주로 여성을 수식한다는 점에서도 사회가 바라는 여성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미디어 속 클리셰나 남성들의 요구에 맞춰 ‘알고도 모른 척’하는 여성은 ‘여우’가 된다.
‘곰’보다는 ‘여우’가 낫다는 남성들의 말이 적극적으로 회자되던 시기, ‘여우’가 되는 정보가 여성들 사이에서 공유되곤 했다. 모니터 앞에서 ‘여우가 되는 방법’을 읽으며 코웃음을 쳤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빈말을 하지 못하고, ‘척’ 하지 못하는 고분고분하지 못한 내 성격을 원망하기도 했다.
한국 사회에서 ‘여우’도 ‘곰’도 아닌 여성은 설 자리가 없다. 목소리가 크고. 주장이 분명하고.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나는 언제나 ‘사회 통념’에 어긋나는 여성이었다. 페미니스트인 내게 한국의 페미니스트는 ‘페미나치’라고 말하던 전 남자 친구. 명확한 이유 없이 내게 “세 보인다”라고 말하던 사람들. “여자는 적당히 모르는 척해야 한다”는 엄마의 말은 자꾸만 나를 흔들며 테두리 밖으로 밀어냈다. 그럼에도 여태껏 나는 ‘여우’가 되고 싶은 생각도 ‘곰’이 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언제나 나는 그저 ‘나’이고 싶었다.
여기저기서 나에게 입 다물기를 강요할 때마다 안전한 공간을 찾으려 애썼다. 대학 때 우연히 수강했던 여성학 수업으로 자연스럽게 읽기 시작한 페미니즘 서적들은 내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위로하며 앞으로 갈 길을 안내했다. 페미니즘은 여태껏 내가 알던 세상을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며, 내게 무엇이 될 필요가 없다고 알려주었다. 그간 나를 불편하게 한 말과 행동들이 모두 나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임을 자각한 순간, 이제부터 어떠한 틀에 나를 가두지 않겠다는 자기 확신이 생겼다.
오랜 시간 동안 여성들은 남성들로부터 ‘후려치기’를 당해 온 탓에, 자신이 얼만큼 멋진 사람인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자신을 뽐낼 필요가 있다. 허상에 나를 맞추기보다 실체로서 존재하는 ‘나’를 위해서라도.
하지만 아직 마저 벗지 못한 코르셋 때문에 나를 부정하게 될 때가 종종 있다. 세상의 편협한 시선에 흔들리고 상처받을 때마다 나는 자존감 보호 기간을 설정해 내가 잘난 것을 생각한다. 또 주위에서 “히니 자체만으로 충분히 훌륭하고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덕분에 나는 여전히 ‘곰’도 ‘여우’도 아닌 온전한 ‘나’로서 살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나도 다른 여성들에게 ‘나 다움’을 잃지 말자고 제안한다.
B급 취향을 연 뒤로 그 안에서 운영하는 여성 글쓰기 모임과 독서 모임, 그리고 손님으로 만나 친분을 쌓게 된 사람들에게 지금 그대로의 당신이 얼마나 빛나는지, 그간 다른 여성들로부터 배운 다정함과 존중의 마음을 전하려 애쓰는 데 하루를 보낸다.
나는 늘 뒤에 올 여성들을 생각하며 앞서간 여성들을 따라 걷는다. 여성들이 알려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도 괜찮다고 믿으면서. 그래서 아직도 맨스플레인(mansplain)이 기본값인 세상에 고한다. 여성에게 필요한 건 보살핌이나 가르침 따위가 아니라 존중이다.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변함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