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며 살았다.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가졌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갔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했다.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기억은 없다. 단지 운이 좋았다.
기울어진 가세에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며 숱하게 이사 다닐 때도 천진한 딸은 2층 집에 때로는 다락이 있는 집에 산다며 기뻐했을 뿐, 부모의 얼굴에 드리워진 걱정과 불안을 읽어내지 못했다. 갑자기 통증을 호소하는 엄마에게 먹일 약이 없어, 동네 약국에 갔을 때도 그랬다. 급체가 무언지 몰랐던 초등학생 시절, 엄마가 당장 약을 먹지 않으면 새파랗게 질린 얼굴 그대로 죽어버릴 것 같았다. 평소 엄마와 친분이 있던 약국 주인은 생긋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지만, 나중에 돈을 가져다주겠다는 언니의 말에 정색을 하고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돈이 없으면 약을 줄 수 없다는 그에게 언니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사정을 했고, 나는 그 옆에서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매대 구석에 쌓인 신문의 글자들을 읽었다. 한참 뒤에야 마지못해 약을 내어주며 내일 바로 약값을 가져오라고 당부하는 약국 주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다시 집으로 달려갈 때도, 약을 살 단돈 몇천 원이 없다는 것을 나의 일이라 여기지 못했다.
갖고 싶은 것이 많았다. 어느 남성 가수의 무대를 보며, 그 가수보다 그가 신은 바퀴 달린 신발이 멋져 보였다. 또래 친구들이 하나둘 신기 시작한 그 신발을 갖고 싶어 안달이 났다. 10만 원이 훌쩍 넘는 가격에 엄마는 사줄 수 없다고 했지만, 어느샌가 그 신발은 내 앞에 놓여있었다. 신발장에 처박힌 신발을 볼 때마다 엄마는 몇 번 신지도 않을 비싼 신발을 사달랬다고 나무랐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갖고 싶은 것이 많았고, 꼭 가져야 했다. 중학교 때는 휴대폰이나 MP3를 사달라고 졸랐고, 고등학교 때는 PMP나 전자사전이 없으니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다며 협박 비슷한 말을 동원해서라도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
몇 년 전 부모님과 외식하러 가는 길에 아빠는 멀리 보이는 맨션을 가리키며 “저 때 참 힘들었다”라고 말했다. 아빠의 말에 조용히 끄덕이던 엄마는 그 맨션을 ‘이사 갈 집을 못 찾아 급하게 들어갔던 집’으로 기억했다. 대화는 퍽 담백하게 들렸는데, 그와 달리 부모의 어깨가 유난히 무거워 보였다.
영화 <인터스텔라>에 등장하는 밀러 행성의 시간은 근처 블랙홀 때문에 지구의 그것보다 느리다. 부모님의 시간을 빨아들인 블랙홀은 가난이었다. 밀러 행성으로 떠난 쿠퍼와 브랜드를 우주선에 홀로 남아 기다리던 로밀리처럼, 나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나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 십수 년 전의 일을, 나의 부모는 마치 어제 일처럼 이사하던 날부터 그 집에서 이사 나가던 날까지 또렷이 기억했다.
난데없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을 서로 다르게 기억해서. 내가 부족함 없이 누려왔던 것들이 내 부모의 시간을 더욱 더디게 흐르도록 한 것 같아서. 무엇보다 나는 부모가 매일을 분투했던 시간도 우리 집의 가난도 모른 채 살아와서. 부모님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나는 뒷좌석에서 소리 없이 눈물을 삼켰다.
사랑과 재채기, 가난은 숨길 수 없다는 말은 거짓이다. 부모님은 우리 자매에게 가난을 철저히 숨겼다. 가난한 형편이 들킬세라, 내 부모는 무던히도 가난으로부터 우리 자매를 분리하려 했다. 늦은 밤 어두운 부엌에 쪼그려 앉아 술을 마시는 아빠와 침대 옆 구석에서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엄마를 자주 봤어도,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부모는 빚을 갚아나가는 와중에도 내가 요구하는 비싼 물건과 대학 진학에 필요한 목돈을 척척 마련해 내게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눈치챌 수 없었다.
언제나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며 살았다.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가졌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갔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했다.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기억은 없다. 내 부모가 내 욕망을 채워주었기에 나는 애초에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수십 년 만에 다시 마련하게 된 집에 들어섰던 순간 엄마가 흘리던 눈물의 의미를, 그 후 또다시 몇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야 이해하게 됐다. 그렇게 부모와 자식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언제쯤 나는 부모의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