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화분을 밖에다 꺼내 둔다. 빈손으로 오라 당부해도 사람들은 크고 작은 화분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하나 둘 선물 받은 화분은 20개에 달하는데, B급 취향 곳곳에 자리해 있다. 내가 식물을 좋아하는 편이 아닌 데다 물 주는 것도 잘 잊기 때문에 식물들이 금세 죽을 줄 알았다. 내 걱정과 달리 나날이 쑥쑥 커서 무성해진 몬스테라 잎은 이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만개했다. 몬스테라뿐 아니라 이름 모를 식물들도 시들해지기는 할지언정 절대 죽지 않는다. 내가 사랑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닌데, 잘 커가는 화분들을 보면 참 기묘하다. 원래 사람이든 식물이든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사랑받는 만큼 건강해지는 법이니까.
사랑이 무엇일까? 인류애가 아닌 섹슈얼한 감정을 바탕으로 한 사랑 말이다. 나는 잘 모르겠다. 한때는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하다 혼자 깊은 상념에 빠지곤 했다. 아무리 오랜 시간 생각을 붙들고 고민해봐도 사랑이 무엇인지 답을 찾지 못했다.
서로가 잘 모르는 상황에서, 그러니까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 사이 오가는 "사랑해"라는 말이 내가 보기에는 너무나 가벼워 보였다. 고귀하다 여겼던 사랑이 무척 흔한 감정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아직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사랑한다'라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사랑이 넘쳐나는 세상에 나의 사랑은 아끼고 아껴야만 희소가치가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무엇보다 사랑이 도대체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막상 연애를 하면 누구보다도 즐겁게 상황에 임하고 상대에게 집중하지만, 그러면서도 사랑이 무엇인지 그 감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몇 번의 연애를 거치면서도 나는 사랑을 알고 싶었다.
얼마 전 읽었던 <스몰 플레저>는 제목 그대로 일상의 소소한 기쁨과 행복을 쓴 소설이다. 재미도 의미도 없이 매일을 살던 주인공 진에게 사랑이 찾아온다. 그 사랑은 바싹 말라버려 쩍쩍 갈라진 땅 위에 내리는 단비처럼 그려진다. 나는 그 소설을 읽으면서 또다시 사랑을 생각했다. 대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쉽사리 사랑한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하고. 그리고 며칠 전 독서 모임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모임원 J는 '쉽게 사랑하는 것이 어때서?'라고 말했다. J는 수없이 많은 연애를 해오면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을 때 나와 마음이 같지 않으면(이를테면 상대가 내게 호감이 없다면) 곧장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섰다고 했다. 내 마음을 상대에게 거리낌 없이 밝히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여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내가 그것을 사랑이 아닌 일시적인 관심과 호감 정도로 생각했다면, J는 그런 감정 또한 사랑의 일환이라 여겼던 점이 달랐다. 그렇게 한동안 J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 과거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번지고, 함께 있으면 자지러질 듯 웃던 그런 날들이.
나는 20대 초반부터 폴리아모리에 매우 관심을 가졌고, 폴리아모리가 지향하는 비독점적 사랑을 긍정한다. 심지어 오랜 기간 친밀했던 사람과 나는 서로가 폴리아모리 사랑을 하고 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스스로 폴리아모리가 가능하다는 걸 인지하면서 육체나 정신, 이성애나 동성애 등 반드시 어느 하나에만 한정되지 않은 여러 형태의 사랑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 마음에 들어온 사람이 생기면 언제나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폴리아모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리고 스스로 폴리아모리가 가능하다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여태 사랑이 무언지를 찾으려 애쓰며 '쉬운 사랑'을 비난했다. J의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자기모순이라는 걸 알았다. 애초부터 사랑이 무언지 알면서 그동안 나는 어떻게든 사랑에 의미를 부여해 그것을 더 어렵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건 호감이었네, 그건 호기심이었네 하는 말들로 당시의 행복과 기쁨까지 부정할 수 없다. 찰나의 감정일지라도 그건 엄연히 나의 것이니까. 사랑을 말하는 <스몰 플레저>와 J의 말은 나에게 더 쉽게, 그리고 마음껏 사랑해도 된다고 알려주었다. '쉬운 사랑'이 일상의 작은 기쁨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이제는 나도 그리 하려 한다. 순간이 모여 하루가 되고 하루가 모여 일상이 되니, 사랑의 순간들이 모이면 사랑으로 가득한 삶을 살 수 있을 테니까. 책을 사랑한 순간이 모여 책에 둘러싸인 일상을 보내는 지금의 나처럼. 그러니까, 무엇이 됐든 마음껏 순간을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