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B급이 A급으로 평가받곤 하지만 그것은 B급의 보수화로 이어질 수 있기에, 언제나 경계하고 반성하는 삶을 태도를 견지하는 것을 지향하자.”
B급 취향의 의미다. 결국 간판에 쓰여있는 그대로 비주류를 전면에 내세운 공간이 바로 B급 취향이다. 취급하는 도서 역시 그렇다. 책을 분류해둔 장르는 크게 페미니즘, 자본과 노동, 젠더/성 소수자, 환경권, 동물권이다. 인터넷이나 대형 서점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책을 선별해 입고한다. 숨어있는 책을 찾기 위해 상당한 시간과 노동력을 투여하는 걸 감수했야 했다. “짙은 정체성과 또렷한 방향성”이라는 문장이 포함된 어느 손님의 방문기를 보며, 그런 나의 수고가 반쯤 덜어진 기분이 들기도 했다.
독립출판물은 그 자체가 비주류이지만, 나는 독립출판물 입고에도 일반 단행본 입고 기준을 그대로 따른다. 대형 출판사는 물론 유명 독립출판사에서 출간된 ‘잘 팔리는 책’은 온·오프라인 할 것 없이 어디에나 널려있는데, 동네 작은 책방에서까지 자본이나 유행의 흐름에 귀속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주류 안에서도 밀려난 비주류를 위해 서가의 한 부분을 기꺼이 할애한다.
그런데도 정리해 둔 독립출판물 판매 내역을 확인할 때면 선별해 들인 독립출판물 안에서도 주류와 비주류가 나뉘는 것을 본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알면서도, 입고 후 한 권도 팔리지 않은 책의 작가 이름을 볼 때면 마음이 한없이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행여나 도서 배치가 잘못되어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위치도 바꿔보고, 손님들께 추천해드리기도 하지만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독립출판물 판매 대금은 분기별로 정산하는데 그때가 되면 알 수 없는 죄책감은 더 커진다. 정산 후 그 내용을 일일이 작가님들께 알려드리는데, 정산 때마다 연락을 드리는 작가님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작가님도 있기 때문이다.
팔리지 않는 독립출판물을 보면 자꾸만 송구한 마음이 드는 탓에, 도서 목록을 살펴보면서 내가 왜 이 책들을 입고했는지 생각했다. 그러고 나니 B급 취향에서 꼭 팔고 말겠다는 사명감이나 책임감으로 책을 받은 게 아니란 걸 확인했다. 그저 그동안 대중에게 가닿지 못하고 흩어지기를 반복했던 누군가의 이야기가 책으로 출간되었다는,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 이야기에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에 입고를 한 것이었다. 결국 순전히 내 욕심으로 서가를 꾸민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태어나 큰 어려움 없이 나름 평탄하게 살아가던 내가 B급 취향을 열고 난 뒤, 자본이 없다는 것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낀다. 높은 임대료와 관리비, 기타 유지비를 충당하려면 대중이 원하는 그러니까 모두가 좋아할 만한 책을 파는 것이 맞다. 하지만 나의 신념을 버리는 것은 곧 나를 버리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드는 탓에 차마 그러지 못한다. 그러니 팔리지 못한 책과 그 책을 쓴 작가의 이름 앞에 생겨나는 괴로움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한편 내가 경제력을 가졌다면 내 신념을 수월하게 지켜낼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에 서글프기도 하다. 해마다 추락하는 독서인구와 비대해지는 온라인 서점을 보고 있노라면, 책방은 돈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자본주의 안에서는 꿈이 현실이 되는 것은커녕, 쉽게 꿈꿀 수도 없다는 걸 어느새 알아버렸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부터 상상의 날개를 달고 매일 꿈을 꾼다. 매주 복권을 사거나 가상 화폐에 투자하지도 않으면서 경제적 자유를 얻는 허무맹랑한 상상을 하곤 한다.
지금은 한정된 공간으로 인해 입고하지 못한 책이 적지 않기 때문에, 만약 나에게 막대한 경제력이 생긴다면 2층 이상의 규모 있는 책방을 만들어서 가능한 한 많은 책을 진열하고 싶다. 상상이 현실이 되면 팔리지 않는 책은 내가 구입해 주위에 나누고, 작가님들께는 정산해드릴 수 있을 테니까 책이 팔리지 않는다고 고민할 필요도 없게 된다.
포항의 용하다는 곳마다 나더러 억만장자가 될 사주라고 했다. 사주만 놓고 본다면 상상만 했던 꿈이 언젠가는 현실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사주를 맹신하는 편은 아니지만, 마치 내 미래를 내다보는 것같이 구는 역학자들의 말이 지금의 불안함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될 때가 있다.
내가 책방 운영을 계속하고 싶은 욕망에 경제적 자유를 얻는 상상을 하며 매일을 버티듯, 독립출판물 작가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 읽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며 글을 썼을 것이다. 독립출판과 동네 책방의 상생은 그 상상에서 시작된 건 아닐까 짐작한다. 독립출판물 작가와 동네 책방 주인이 서로가 직접 대면하지 않더라도 모종의 동지애를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상생의 증거다.
개별화를 부추기고 주변을 돌아보지 않게 만드는 자본주의식 사고가 팽배한 오늘날, 적어도 동네 책방은 연대와 상생의 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네 책방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지역의 실핏줄 역할이니까.
그래서 ‘팔릴 책인가?’하는 고민 없이 입고 요청 메일에 답을 한다. 그리고는 빈틈없는 책장에 어떻게든 자리를 만들어 독립출판물을 진열한다. 나와 작가 사이에 연결된 끈이 동네 사람들에게도 이어질 수 있도록.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아날로그식으로 어떠한 공간에서 정가에 책을 판매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미친 짓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책방을 연, 미친 짓을 저질렀다. 그것도 코로나19 시대에 말이다.
‘지치면 지고, 미치면 이긴다.’라는 말이 있다. 지치지만 않는다면 이제 이길 일만 남았다. 거기에 나는 특별히 내 신념을 지키는 또 하나의 미친 짓을 더해, 계속 나아가려 한다. 독립출판 작가와 전국의 작은 동네 책방 대표, 그리고 이곳을 찾는 손님들의 응원이 있는 한 계속해 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모쪼록 다른 동네 책방 대표들 역시 나와 같은 마음으로 오늘을 보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