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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니 Sep 27. 2022

B급취향의 마스코트

뒤엉킨 털 사이마다 도깨비 풀과 벌레, 피부병을 옴팡 뒤집어쓴 작은 몸은 우리 집에 왔던 6년 전 순돌이가 되었다. 순돌이는 마치 순돌이었던 것처럼 이름에 잘 적응했다.

처음 산책을 했을 때 순돌이는 길목에 서 있던 아저씨들의 눈치를 보며 그 옆을 지나가기를 거부했다. 급기야 깨갱거리며 울기까지 했는데, 그 뒤로도 한동안 산책 때마다 남성만 마주치면 같은 행동을 보이는 순돌이를 보면서 남성에게 학대받은 기억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순간 으르렁거릴 때도 있지만 이내 쓰다듬어 달라고 꼬리를 살랑이는 순돌이가 사람 손길에 익숙한 것도 같아 보였다. 사람에게 버려진 건지 그래서 떠돌아다니다 학대를 받은 건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확실한 건 내가 주는 사랑을 순돌이도 온전히 느낀다는 걸 알 수 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은 내가 순돌이를 무척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뻐한다지만 순돌이는 내가 낳은 새끼도 아닌데 어쩜 이리도 예쁜지 모르겠다. 잘생긴 얼굴, 길게 뻗은 팔다리, 아무 때나 짖지 않는 침착함, 사람의 음식을 탐내며 달려들지 않는 예의, 몇 시간이고 같은 자세로 창밖을 내다보는 그만의 감성.. 예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서 다 말하기도 어렵다. 순돌이는 착하기까지 하다. 다른 개들 같았으면 입질했을 법한 다소 거친 나의 애정 표현에도 순돌이는 언제나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이따금 땅속으로 푹 꺼져버리고 싶은 기분이 될 때 귀를 축 늘어뜨리고 가만히 앉아 나를 응시하는 순돌이가 마치 나를 위로해주는 것 같아 눈물을 뚝뚝 흘릴 때도 있다. 그렇게 순돌이의 새카만 눈동자를 한참 보고 있으면 내 고민이 해소되기도 했다.

여태 누군가에게 열렬한 애정을 쏟은  없었던 내가 이토록 의욕적으로 사랑을 내보이는  순돌이라서 가능한 일이다. 무한한 기쁨과 행복을 주는 순돌이에게 내가 주는 사랑은 오히려 보잘것없게 느껴질 때가 많다.     


순돌이는 종일 내내 나와 함께 했다. 함께 출근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잤다.

인터뷰할 때면 나는 순돌이랑  함께 출연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찍힌 사진과 영상물은 인터넷과 지면에 오르며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그걸  때마다 순돌이에게 출세했다며 머리를 쓰다듬곤 했다.


손님들은 나만큼 순돌이를 예뻐했다. 당당히 쓰다듬기를 요구하며 몸을 비벼대는 순돌이의 뻔뻔함에 손님들은 매번 항복했다. 순돌이가 있는 날만 오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지나가던 길에 순돌이의 유혹에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들어오는 손님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순돌이는 B급 취향의 마스코트로 불렸다. 순돌이는 그 사실을 아는 양 똬리를 틀고 언제나 문 앞을 지켰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사람들이 B급 취향 문을 열고 순돌이를 힐끔 내려다보더니 내 앞에 섰다. 그들은 이곳에 개가 있다는 내용으로 국민신문고 민원이 들어왔다며, “언제까지 개를 치울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     


그날은 내가 출연한 유튜브 영상이 올라온 지 사흘이 지난 시점이었다. 영상은 생각보다 높은 조회 수를 기록했고 그 아래 3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내 말에 깊이 공감하고 응원한다는 댓글이 주였지만, 비꼬고 조롱하는 댓글도 있었다. 위생과 공무원의 말을 듣고 나는 혹시 영상을 본 누군가 신고를 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음식점에 동물이 있으면 안 되는지 몰랐던 나의 무지를 원망하면서도 공무원들의 고압적인 태도가 유쾌하지 않았다. 동물이 상주하는 다른 카페들은 어떻게 된 것이냐는 내 질문에 “다른 곳에서 동물을 키운다고 여기서 키워도 되는 게 아닙니다.”라며 동문서답하는 공무원을 보며, 신고가 들어온 곳만 점검하는 찌든 관료주의를 느꼈다. 그러나 개를 “치운다”라고 표현하는 그들과 더 이상 대화할 이유가 없었기에, 나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몇 년 전 나는 한 달간 유럽 여행을 떠났다. 유럽 전역에서 풍기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는 한국을 잊기 충분했다. 거리를 걸을 때면 개와 산책하는 사람이 자주 보였다. 그때마다 순돌이가 생각났다.

지하철에서 내 맞은편에 앉은 주인의 다리에 기댄 대형 견을 봤다. 사람 많은 지하철에 떡하니 앉아 있는 개의 모습은 한국에서 쉽게 보지 못할 장면이었다. 그리고 어느 술집에서는 사람들과 함께 의자에 앉아 있는 강아지를 봤다. 그 뒤로도 나는 종종 사람들 틈에 있는 동물을 만났다. 한국이었다면 분명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을 텐데, 유럽에서 동물은 어느 곳에서나 사람과 함께 했고 주위 사람들의 애정 어린 눈길을 한 몸에 받았다.     


나는 한국에서도 어디서나 동물이 예쁨 받기를 원한다. 동물과 사람이 다르다는 차원을 넘어 동물이 존재로서 존중받기를 바란다. 그러나 마주하게 되는 동물의 삶은 비참하다.

음식점 입장이 거부당한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 시무룩한 표정의 안내견 영상을 보았을 때, 포인핸드(전국 보호소 유기 동물 플랫폼 서비스)에 게시된 지 며칠 안 된 유기 동물 사진에 안락사되었다는 표식이 달린 것을 보았을 때 참담한 마음을 애써 꾸역꾸역 삼켰다.     


순돌이와 산책하던 어느 날 마주 오던 할아버지는 “개가 사람 가는 길을 막는다.”며 순돌이에게 발길질하려 들었다. 뉴스에서 봤던 동물 학대 문제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벌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날 처음 했다. 그리고 차에 강아지를 끈으로 묶은 채 주행을 하거나, 길고양이를 갖은 방법으로 죽이는 사람 역시 그 할아버지처럼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공포가 일었다.

동물을 사랑한다면서도 어떤이는 분양받을 반려동물이 ‘순혈’인지를 따지거나 동물원 펜스 안에 갇힌 동물을 구경한다. 또 어떤이는 시각장애인과 동행한 안내견을 쫓아내고, 쇼핑하듯 반려동물을 사거나 키우던 반려동물을 버린다. 동물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얼굴들이다.     


주변에 채식을 실천하는 친구들이 있었던 덕분에 나는 비교적 일찍 비건 문화를 알게 됐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나는 반려동물과 고기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고, 그 뒤 페스코 채식을 실천했다.

오래전이지만 그들과 외식하려 할 때면 갈 수 있는 곳이 없어 한참을 거리를 헤매던 기억이 선연하다. 채식하는 친구에게 “식물은 생명이 아니냐.”는 말로 비생산적인 논쟁을 만들려던 사람들과 “착한 척하지 말라.”던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들 중 상당수는 반려동물과 함께 살고 있었다.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과 채식을 하는 건 같은 맥락에 있다. 그렇다고 고기를 먹는 사람이 동물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조금 확장시키면, 채식으로 연결된 길이 보인다. 동물을 사랑하는 건 감수성이 하는 일이기에 육식을 끊는 것 역시 감수성의 문제다.

다름을 소외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리고 조금이나마 육식 소비를 줄이려는 마음에 나는 아무도 배제되지 않도록 B급 취향에서 비건과 논 비건 디저트를 만든다.     


포장 비닐에 싸여 우리 앞에 나타나는 고기는, 한때 그것이 두 눈을 반짝이며 숨 쉬는 동물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하게 만든다. 공장식 축산업의 실태를 애써 외면하고, 동물권 단체를 비난하는 건 죄의식을 씻기 위한 의식적인 행위다.

육식 중심 식생활에 익숙한 우리가 육식을 쉽게 끊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나 역시 일신상의 문제로 현재는 채식을 중단한 상태다. 그러나 언제고 다시 시작할 용의가 있다. 동물이 인간과 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치우다’는 단어는 ‘1. 물건을 다른 데로 옮기다. 2. 청소하거나 정리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개를 치우라’는 공무원의 말은 순돌이를 생명체로 본 게 아니라 물건으로 봤다는 의미다. 순돌이가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깜박이며 살아있음을 보여주는데도 그들에게 순돌이는 죽은 존재였다.     


순돌이의 빈자리는 손님들이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순돌이를 보기 위해 왔던 손님도, 순돌이를 예뻐했던 손님도, 내 인터뷰를 보고 찾아왔던 손님도 내게 순돌이의 부재 이유를 물었다. 손님들은 대답을 얼버무리는 나를 순돌이 없이 괜찮냐며 걱정했다.

나는 순돌이의 마음이 걱정된다. 자신을 살아있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 공무원들의 말을 알아들었을까 봐, 쫓겨났다는 사실을 알까 봐, 그래서 상처받았을까 봐.     


이제 순돌이는 B급 취향에 없다.

유기견이었던 순돌이는 실내 배변을 하지 않는다. 와식 생활을 즐기는 나에게 순돌이 산책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순돌이가 B급 취향에서 강제 퇴거당한 뒤 만삭인 언니와 아픈 다리를 절뚝이는 엄마가 교대로 순돌이를 산책시킨다. 언니와 엄마가 직장 일로 바쁜 탓에 혹시라도 순돌이가 화장실을 가지 못해 계속 참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지만, 발이 묶인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B급 취향 문을 닫고 나면 순돌이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간다. 방문을 열면 언제나 순돌이가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

B급 취향 벽에 붙어있는 순돌이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본다. 오늘은 순돌이와 조금 더 오래 산책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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