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삶의 교집합
건축학과를 들어오고 맞은 당신의 첫 학기는 어땠는가.
나름대로의 변화가 생겼나 싶다가도, 여전히 어른인 체 흉내내기 바쁜 아이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혹은 수많은 로망을 껴안고 온 팔에 조금은 힘이 빠졌을지 모른다. 크리틱의 설렘은 전날의 두려움으로 전락했고, 눈만 맞으면 사랑이 오갈 줄 알았던 캠퍼스에선 맥없는 표정만이 서로를 위로하는 장소임을 깨달았다. 그래도 아직은 '경험'이라는 단어에 잔뜩 부푼 미래를 걸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 찰나의 새내기 시기에 배운 게 있다면, 비논리 속에서 논리를 세우는 법일 테다. 이 말이 모순에서 그치지 않고 역설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입학 이후 처음으로 밤을 새운 날이었다. 동기들과 하는 실없는 소리에도 지쳐갈 즈음 창밖이 밝아졌다.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가 들어오며 크리틱이 시작되었다. 그날따라 유독 뒷차례였던 난 전날에 먹다 남아 미지근해진 커피를 입에 물고 순서를 기다렸다. 마침내 차례가 돌아왔고 밤새 고민한 유치한 문장들을 되새긴 다음 발표를 시작했다.
그러나 학수고대하던 크리틱은 밤새 만든 괴물에 혹평을 받고 눈물로 마무리했다. 교수는 알쏭달쏭한 언어들만 뱉으며 밤새 지친 머리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교수가 그리 강조하던 '논리'가 무엇인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서 졸음 속 희미한 정신으로 골몰했다.
논리. "생각이 지녀야 하는 원리와 법칙."
결과물이라 포장한 것들엔 원리가 없었다. 교수의 언어를 겉으로 따라가기 바빠 수정을 가할수록 누더기에 덧붙인 천만 늘어갔다. 처음 밤을 새우고, 동시에 처음 혹평을 받은 그날에서야 느꼈다.
건축은 결국 하나의 결과물만 남는다. 그 과정에서 고민하는 재료와, 형태와, 질감과, 기능의 모든 것들은 결과물 하나로 일축된다. 나의 카페인 섭취량을 알아주지도 않아 잔인하지만, 그만큼 결과는 단순하다. 수많은 가능성 중 내가 선택한 단 하나의 요소가 결과가 되려면, 그에 응당한 타당성과 논리는 있어야 되지 않는가. 예술에서 태어나 이성적인 작품으로 굳어지는 것. 다시 말해 비논리에 논리를 쌓아 올리는 것. 내가 만든 어설픈 건축의 정의이다.
침대에 누워 장황한 독백을 하다 문득 생각이 그쳤다. 내 방을 둘러보았다. 들쑥날쑥 나열된 건축 도서들과 그 옆에 놓인 달력. 몇 년 치 먼지에 눌린 채 그 자릴 지키는 가족사진. 나무 액자에 몸담고 있는 꾸깃한 대학합격통지서까지. 짧디 짧은 추억을 넘겨보았다. 그러다 모든 게 비슷하다 느꼈다. 마냥 좋아서 목표한 전공을 위해 머릴 쥐어뜯던 독서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선물을 비교하고 고민하다 지새운 밤 등. 감정에서 시작한 관계와 목표를 위해 이성을 발휘했다. 비논리 속에서 피어난 것들은 논리로 다듬어졌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그래도 깡그리 모든 생각을 지우고 싶진 않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믿는다. 결국 이유를 댈 수 없는 감정과 상상력에서 삶과 건축의 기로가 결정되고, 나름의 논리로 길을 다듬는다. 건축과 삶의 교집합이 있다면, 아마 비논리 속에 논리가 있는 모순이 아닐까. 모순이더라도 행복하고 가치있다면, 한 번쯤 믿어 볼만 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