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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미스타 Aug 11. 2024

엄마의 인공위성

2월 28일


 오전 6시 44분, 남동생에게서 카톡이 왔다. 나는 평소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 카톡 알림 방해금지 설정을 해두는데 이상하게 어제는 그 설정을 해지해놓아야 할 것 같았었다. 그와 더불어 잠도 오지 않아 새벽에 겨우 잠이 들고서 두어시간이나 지났을까, '카톡'하고 울리는 알람 소리에 불길한 마음으로 확인했을 때에는,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혈압도 떨어지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할 것 같다는 병원의 연락이 전해졌다. 

 나는 그 상황에서 왜 갑자기 '이번에 가면 한참 못 올텐데 유튜브 영상이나 하나 금방 만들어놓고 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엄마의 격리 기간도 내일이면 풀릴테고 엄마가 집에 돌아오면 그때부터는 엄마 수발을 들어야 하니까, 왠지 예상했던 2~3주보다 더 오래 있다가 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잠깐 누워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다시 한번 카톡이 울렸다.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지금 당장은 아닐거라고 말하고 2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엄마집에 함께 사는 남동생과 아빠는 엄마보다 확진을 늦게 받아서 계속 자택격리 중이었고, 언니는 서울에, 여동생은 대전에, 나는 대구에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격리 병동에 혼자 있었다. 


 엄마집에 갈때 이것도 들고 가고 저것도 들고 가야지 하며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도 챙겨지질 않았다. 자택격리로 이동이 불가한 남동생을 제외하고 가장 빨리 병원에 갈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나였다. 나는 차키와 지갑과 평소 들고다니던 백팩, 검은색 정장 가방 하나만 들고 집을 나섰다. 마음은 급한데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럴때 하필 내 차를 가로막고 있는 남의 차를 빼달라고 전화를 해야했고, 조금이라도 빨리 가보려고 몇 분 차이도 안 나는 고속도로를 선택했다가 엉뚱한 길로 들어가 시간이 지체되었다. 어차피 격리중인 남동생이 보건소에 이동 가능한지 확인을 해야 해서 9시 언저리에만 도착해도 늦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렇게 내 예상보다 늦어진 몇 분이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나는 남동생과 아빠가 지내고 있는 1층에는 들어가지 않고 2층 옥상에서 잠시 기다렸다. 곧 남동생의 전화가 걸려왔고 본인은 이동할 수 없으니 누나가 대신 병원에 가야할 것 같다고 했다. 일단 미덥지는 못하지만, 우리집에 있으나 마나 한 아빠를 대신해 아빠 역할이라고 해주었던 엄마의 남동생(삼촌)들에게 연락이나 돌리라고 하고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장례식장에 주차한 나는 씻고 바로 나가겠다는 큰삼촌의 전화를 받았고, 먼데서 장례 치르지 말고 집 가까운 곳에서 장례를 치르자는 중간삼촌의 전화도 받았다. 

 슬퍼도 QR 체크인은 해야했다. 지금은 대 코로나 시대였다. 병원 직원의 안내에 따라 병원 장례식장에 딸려있는 사무실에 들어가 엄마 이름을 말하자 서류 몇장을 보여주며 엄마의 나이와 주소 등 신원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무실 한켠에 마련되어 있는 테이블 의자에 앉아서 직원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었지만 모든 것이 불안했다. 나도 모르게 몸이 벌벌 떨렸다. 


 엄마는 아침 7시 5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코로나 확진 상태로 사망했기 때문에 바로 화장해야 하고 얼굴은 볼 수 없다고 했다. 더불어 코로나로 사망했기 때문에 나라에서 장례 지원금이 나온다는 말도 덧붙였다. 내 귀에 지원금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너무 억울해서 몇번이고 다시 물어 보았다.


''잠깐이라도 볼 수 없나요?''

''안 될 것 같습니다.''

''아니, 멀리서라도 볼 수 없어요?''

''음..''

''방법이 없나요?''


담당자는 계속되는 나의 질문에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건조하게 몇마디를 나누고는 나에게 말했다.


''방역복 입으시면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다행이었다. 담당자와 장례 물품 선택을 마치고 잠시 기다리는 동안 큰삼촌이 사무실에 들어왔고 담당자는 내가 아닌 삼촌을 보며 물었다.


''얼굴 확인하러 누가 들어가실거죠?''

''언니랑 저랑..''

''한분만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나는 당연히 내가 들어가야 했다. 최근에 엄마와 같은 집에서 지낸 것은 남동생이지만, 사실상 엄마와 한 집에서 가장 많은 감정의 시간을 보낸 내가 당연히 엄마를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요청해서 얻은 기회였다. 하지만 한명만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큰삼촌은 서울에서 오고 있는 첫째가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제가 들어갈 거예요.''

''느그 언니가 드가야지!''

''언니가 나 들어 가라고 했어!''


 실상 나를 제외한 남매들은 누가 엄마의 마지막을 보러 들어가건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유난히 엄마의 애정을 갈구했던 나만이 '반드시' 내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옆에 남자 어른인 삼촌이 함께 있었지만 나의 마음은 안정되지 못했다. 일 하다 말고 기차를 타고 내려오고 있는 언니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언니와 여동생을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퇴원 비용 정산이 되었다고 수납처에서 연락이 왔지만 나는 가진 돈이 없었다. 그래서 나와 다르게 안정된 직장이 있고 수중에 돈이 있는 언니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삼촌에게는 기대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돌려받는다 할지라도 어쨌든 내가 먼저 내고 다시 돌려받아야 하는 거니까 가진 돈이 없는 나에게는 참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남동생은 엄마 가방에 돈이 있을 거라고 그 가방을 찾아오라고 했지만 코로나로 사망한 환자와 관련된 것은 그 어느 하나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었다. 11시에 찾으러 오라고 해서 갔더니 소독이 완료되면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하며 나를 내보냈다. 


 기차에서 내린 언니가 택시를 타고 병원에 도착했고 여동생은 엄마집 근처 장례식장에 가서 바로 예약부터 잡아놓기로 했다. 언니가 엄마의 퇴원 비용을 정산하는 동안 나에게는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다. 누구는 작년 말에 어머니 아버지를 다 보내드렸고 누구는 딱 한달 전에 어머니를 보내드렸다고 했다. 나는 솔직히 엄마가 겨울만 버티면 좀 나아질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의 가족이 모두 겨울에 돌아가신 게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중간삼촌을 만났고 장례식장 이야기를 조금 하다가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제는 엄마를 보러 가야 한다고 했다. 막상 방역복을 받아 들고보니 실감이 났다. 아, 엄마는 오전 7시부터 12시인 지금까지 숨이 멎은 채로 계속 혼자 있었겠구나.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나마도 코로나 사망으로 장례식장에 자리가 없다고 뉴스에서 막 떠들기 시작했을 무렵이었기 때문에 이만큼이라도 기다려서 순서가 돌아온 것 자체가 다행이라고 했다. 

 나에게 주어진 방역복은 생각보다 입는 것이 까다로왔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얇고 조금만 삐끗해도 찢어질 것 같은 재질이었다. 나는 입고 있던 롱패딩을 벗어두고 방역복에 다리부터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몸통의 지퍼를 올리고 신발 위에 비닐 신발을 또 신었다. 니트릴 장갑을 방역복 소매가 덮이게 끼고 안경 위에 고글까지 꼈다.


''안경 벗으면 아무것도 안 보여요?''

''네.''

''안경 위에 고글 쓰면 김 서릴 수 있어요.''


 나는 차라리 안경에 김이 서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안경을 벗으면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내가 잠깐 숨을 안 쉬더라도 엄마 얼굴을 제대로 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글은 생각보다 큰 불편함 없이 안경 위에 장착되었고 걱정처럼 김이 서리는 일도 없었다. 방역복 장착을 끝내고 담당자를 따라 밖으로 나온 나는, 지금부터 어디로 가는지도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한마디 한마디 시키는대로 따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방역복 입은 남자 두명이 관이 놓인 바퀴 달린 이동식 침대를 밀고 오며 나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왠지 모르게 눈 앞에 보이는 관 안에 엄마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엄마의 얼굴을 빨리 보고 싶다는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따라가면서도 중간중간 턱이 있거나 부딪힐만한 것이 보이면 손에 땀이 났다.

 엄마 얼굴은 언제 보여주는 걸까? 지금 이대로 화장터로 가는 걸까? 나는 운구자들을 따라 별다른 말 없이 철문을 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비밀번호를 눌러야 열리는 제한구역의 문을 몇개 지났다. 이동식 침대를 주욱 밀고 가다가 운구자 한 명이 말했다.


''첫번째 병실이라고 안 했어?''

''아, 맞다. 뒤로.. 뒤로...''


 내가 잠시 혼란해하며 관을 쳐다보고 있을 때, 안쪽에 서있던 다른 한명이 병실 안에서 담요로 덮인 침대를 끌고 나왔다. 나는 그제서야 엄마가 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병실에 방치되어 있었음을 깨달았다. 엄마의 침대를 끌고 나온 사람이 얼굴 부분의 모포를 살짝 걷었다.


''성함이 오..''

''일화.''

''맞으십니까?'' 

''네.''


 푸른색 모포를 살짝 걷어내자 평소와 같은 무표정에 입술만 파란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코로나 확진자이며 중증 기저질환자로 격리병동에서 숨을 거두었다. 3초는 되었을까.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금방 다시 모포에 쌓여진 엄마는 관으로 옮겨졌다. 그렇게 우리 엄마는 코로나 사망자 숫자에 포함되었다.


 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남자 둘이 엄마의 얼굴(목) 부분과 발목 부분을 잘 감싸더니 엄마 밑에 깔려있는 흰 천을 단단히 고쳐잡고 하나 둘 셋 숫자를 세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관 안으로 들어간 엄마의 신체를 다시 잘 정돈했다. 내가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를 최대한 갖추는 것이 그들의 직업윤리인 것일까. 어디 한 구석 배기는 곳이 없을 때까지 잘 정돈한 다음, 관 안에 함께 넣어 왔던 수의를 한장 한장 조심스레 꺼내어 위치에 맞게 덮기 시작했다. 엄마는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이기 때문에 염도 하지 못하고 수의도 입힐 수 없다고 했다. '입혀줄 수는 없지만 덮어드릴 수는 있습니다.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라는 장례 담당자 질문에 나는 순간 사고 회로가 멈추었고 남매들 단톡에 상황을 그대로 전달했었다. 덤덤하게 상황을 받아드리는 듯 했던 언니가 수의는 가장 비싼걸로 하자고 했고 나는 그 의견을 따랐다. 가장 비싼 수의는 비단이라고 하더니 정말 때깔이 고왔다. 생각보다 수의의 구성이 꽤 여러장이었고 마지막 즈음에 분홍색 치마 한장이 덮였다. 


'아, 엄마 분홍색 안 좋아하는데.. 차라리 보라색이면 좋았을 걸...'


 수의를 차곡차곡 다 덮고 난 뒤 지퍼를 쭈욱 닫았다. 이게 아까 말했던 사체낭이구나. 사체를 담는 주머니. 사체가 된 엄마.


 하지만 나는 아직도 여전히 이상했다. 주머니에 담겨진 엄마의 손 부분이 조금씩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아까부터 계속 조금씩 조금씩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순간 '우리 엄마 아직 살아있어요!'라고 입 밖으로 외칠 뻔 했지만 그토록 감정적인 내가 이성의 끈을 붙잡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눈물을 꾹 참는 동안 드디어는 관 뚜껑까지 단단히 닫혀버렸다. 다행스럽게도 내 안경에는 김이 서리지 않았고 입관하는 동안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엄마를 볼 수 있었다. 화장을 위한 입관을 마친 우리는 들어온 방향을 똑같은 방식으로 거꾸로 돌아가 처음 운구자들과 만났던 곳까지 나왔다. 언니와 삼촌들은 내 가방과 롱패딩을 들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하고 있는 운구 차량에 엄마, 나, 운구자 순서대로 탑승했고 화장터에 도착하기까지 우리들은 모두 운구차량 안에 쭈구리고 앉아 각각의 손이 닿는 곳을 붙잡고 있었다. 


''뒤를 보고 기대서 앉는게 더 편할 거예요.''


 한 사람이 나의 불편한 자세를 보고 조심스레 한마디를 건넸다. 그리고는 화장터에 도착하기까지 덜컹거리는 차량의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화장터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사람은 살지 않을 것 같은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차의 속도가 느려지고 이내 멈춘 차의 문이 열렸다. 탑승 순서의 반대로 우리는 하차했다. 화장터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담당자가 나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


''눈 감고 팔 벌리세요.''


그는 눈앞에 있던 소독기계를 번쩍 들어 나에게 분사했다.


''뒤 도세요.''


 내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사정없이 소독액을 분사하고 소독기계를 내려놓았다. 나는 소독액에 흠뻑 젖은 채 팔을 그대로 벌리고 서있었고 이제야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언니와 삼촌들이 보였다.


''신발 쪽은 손으로 벗기지 말고 발로 밟아서 벗겨보세요.''


 가만히 서있는 것도 간신히 버티고 있던 나는 신발 위를 덮고 있던 비닐 신발을 달달 떨며 벗겨내었다. 날씨가 추워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남은 장갑과 방역복 전체를 벗어내고 마지막 고글까지 벗어냈을 때, 나는 코로나 시대의 의료진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을 또 한번 느꼈다. 이 답답한 걸 하루종일 매일매일 하고 계시는 구나. 내가 방역복을 벗는 동안 엄마는 화장터 안으로 옮겨졌고 나는 엄마의 관이 눈 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걸려요?''


 큰삼촌이 물었고 한시간반 정도가 걸린다는 답을 들었다. 이제 한시간반 동안 뭐 해야하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와 다르게 큰삼촌은 야외에 있는 등나무 벤치에서 편의점 비닐봉지를 열어 맥주와 마른안주와 커피를 꺼냈다. 


''무라.''

''병원에서 내 차 빼와야겠지?''


 나는 문득 나와 내 차가 멀리 떨어져 있음이 불안했다. 그래서 바로 삼촌 차를 타고 병원에 갔다. 화장터까지는 운구차로 이동을 했기 때문에 내 차는 아직 병원에 있었다. 


''엄마 가방 물어보고 갈테니까 삼촌 먼저 가 있어.''

''그래.''


 삼촌은 나를 내려주고 바로 다시 화장장으로 갔고 나는 11시에 받았어야 했던 엄마 가방을 찾으러 다시 본관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직 가방 소독이 끝나지 않았다며 출입을 거절당했고 나는 차만 가지고 다시 화장장으로 돌아왔다. 병원에서 다시 화장장으로 돌아오는 길은 나의 느린 운전으로도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아까 운구차에 타고 갈 때는 그렇게 멀게 느껴지더니. 그리고 화장에 필요하다고 했던 한시간반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나는 술도 커피도 즐기지 않아 마른 입으로 기다리던 중이었는데 문득 어제 친구에게 받아 온 비건스콘 몇개가 차 안에 방치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이거 먹는 영상 찍어서 유튜브에 올린다고 했었는데 어제 바로 먹을 걸 그랬나. 스콘이 들어있는 종이봉투를 꺼내들고 등나무 벤치로 갔다. 공복이라 어지럽고 속이 미식거려 뭐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꺼내오긴 했지만 손에 든 스콘은 쉽게 목구멍을 통과하지 못했다. 


''누나 결국 환갑도 못 채우고 갔네.''

''내년이었는데...''


 화장장 직원 한 명이 사무실에서 엄마가 들어간 방향으로 걸어갔다. 나는 어렴풋이 화장이 끝났겠구나 싶어 그 사람을 따라 갔고 정확히 내가 입구에 서자마자 화장로에서 엄마가 나오고 있었다. 다 타버린 재와 굵은 뼈 몇개가 눈에 들어왔다. 직원 한명이 큰 양철통 같은 쓰레받기를 화장로 끝부분에 받치고 다른 한명이 수수빗자루로 재를 쓸기 시작했다. 

 아니, 빗자루와 쓰레받기라니, 좀전까지 사람의 형체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뭔가 철판같은 것이라도 따로 받쳐져 있어서 그대로 그냥 스르륵 모아질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너무나 충격을 받았다. 저렇게 하면 이전에 화장한 사람의 뼛가루도 남아있을 거 아니야? 내 엄마의 뼛가루 일부도 저기에 그대로 남을텐데 화장을 이렇게 한다고? 많은 생각들이 내 머리를 때리고 가는 동안 쓰레받기에 담긴 뼈와 재는 어딘가에 부어져 윙 하는 소리와 함께 아주 고운 가루가 되어 미리 준비 된 하얀 종이에 다시 쏟겨졌다. 하얀 종이에 곱게 쌓여 유골함에 들어간 엄마는 나에게로 왔고 우리는 이제 장례식장으로 가야했다.


''나랑 언니는 엄마 가방 좀 찾아서 갈테니까 삼촌들 먼저 갈래?''

''유골함 들고 다른데 들렀다 가는거 아니다.''

''그럼 언니가 유골함 들고 삼촌이랑 먼저 가있어. 내가 엄마 가방 찾아서 가께.''


 엄마 가방은 소독이 끝나면 연락을 주겠다고 나를 돌려보내더니 결국 화장이 끝날 때까지 감감무소식이었고 나는 혼자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엄마 가방 찾으러 왔는데요.''

''무슨 가방이요?''

''아저씨, 저 아까도 아저씨 있을 때 이렇게 두번이나 왔다갔다 했는데요. 코로나 사망이라고 엄마 물건 소독 끝나면 전화 주겠다더니 화장 다 끝나도록 연락이 없어서 세번째 다시 오는 거예요.''

''잠시만 있어보이소.''


 한참동안 나를 막아섰던 남자는 마침 엄마가 있던 병동의 간호사들이 지나가는 걸 붙잡아 나를 데려가라고 했다. 원래의 나라면 기약없이 반복되는 상황에, 있는 화 없는 화를 몽땅 끌어다 냈겠지만 나는 그냥 빨리 엄마의 가방을 찾아오고 싶었다. 남동생은 병실에서 남의 물건에 손대는 사람들이 있어서 빨리 찾아와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엄마가 마지막에 가지고 있었던 것들을 최대한 잘 챙겨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간호사 선생님들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문 밖에 커다란 검은 비닐봉지가 보였다. 비닐 밖에 뭔가 쪽지가 붙어있는 것 같은데 잘 보이지 않았다. 가방을 늦게 돌려준 것은 화가 나지만 이 사람들도 많이 바쁘고 힘든 상황일테니 최대한 민폐를 끼치지 말고 조용히 가지고 가자. 천천히 다가가 쪽지에 쓰인 엄마 이름을 확인했다. 검은봉지 밖으로 엄마가 최근에 짚고 다니던 등산용 지팡이가 삐죽 나와있었다. 

아, 엄마꺼 맞구나.

 동행해주신 간호사 분들께 목례를 하고 비닐봉지를 들어 다시 엘리베이터에 탔다. 비닐봉지는 양손으로 들기에도 꽤 무거웠고 내 차가 있는 곳까지 바닥에 끌리지 않게 모든 힘들 다 써서 번쩍 들어 옮겼다. 주차장에 도착한 나는 왜 이렇게 무거운건지 비닐봉지를 풀어 무엇이 들어있는지 확인했다. 비닐 안에는 엄마의 가방과 마지막으로 입었던 옷과 신발 등 여러가지가 있었다.

 엄마 가방을 열어보니 엄마가 밥 대신에 억지로 먹었던 경장영양제 엔커버액이 몇개 들어있었다. 엔커버를 꺼내고 난 가방 바닥에는 빳빳한 5만원짜리 지폐 한묶음이 봉투에 들어있었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격리병동에서 병원비로 쓰려고 현금을 갖고 계셨던 것 같았다. 나는 돈뭉치 사진을 찍어 남매톡에 올리고는 장례식장으로 출발했다. 


 엄마와 동네 드라이브를 할 때 가끔 지나다니면서 표지판을 본적이 있었던 장례식장이었다. 일단 주차를 하고 내 검은 정장을 챙겨 엄마 빈소에 올라가니, 언니와 여동생이 치마 상복을 입고 있었고 나에게도 빨리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나는 내 정장을 입겠다고 했지만 이모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엄마 앞에서 큰소리 내지말고 입어라. 바지 입고 위에 그냥 입어도 된다.''


 나는 여자가 치마 상복을 입어야 하는 관습이 너무 싫었지만 이모의 진지한 표정에 투덜거리면서 치마 상복을 걸쳐 입었다. 그래, 평소에도 엄마랑 이런 걸로 자주 투닥거렸는데 오늘 하루만 입자. 


''연이는 여 와서 니 이름 써라.''

''뭔데?''

''니 **고등학교 나왔다 카니까 여기 지역 장례식장이라 할인 해준다 카드라.''


 와우. 내가 살면서 제일 후회라면 후회했던게 이 학교 나온건데, 이걸 이렇게 써먹는다고? 


 내가 엄마 가방을 찾아 오느라 늦는 동안 장례식장에서는 많은 일이 진행된 듯 했다. 뭔가 종이를 한장 주면서 연락처와 계좌번호를 적으라고 했는데 나는 그것이 뭔지도 몰랐고 뒤늦게 부고 알림 문자 발송을 위한 것이었단 걸 알았다. 언니와 여동생은 각자 지인들에게 문자를 돌렸고 나는 먼저 엄마 전화기를 들어 폰번호로 저장된 모든 번호에 부고 문자를 보냈다. 그래도 언니나 여동생보다는 내가 엄마 지인들을 더 많이 알 것이고, 찾아오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다 내가 인사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말 쓸데없는 고집이었지만 아무도 그 귀찮은 일을 먼저 하겠다는 나에게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허둥대다가 시간이 많이 늦어졌고 내 지인들에게까지 문자를 보내고나니 정말 모든 체력이 다 소진된 듯 했다. 그때까지 별달리 먹은 것도 없었다. 


 모두 제 정신이 아니었다. 낯선 환경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에 둘러쌓인 여동생의 아기, 나의 조카는 연신 비명을 지르며 울어댔다. 언니와 동생은 각자의 손님을 치르느라 바빴지만 나는 아무도 오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엄마 영정사진 앞을 계속 지킬 수 있었다. 하나같이 타지역에 살고 있는 친구들이 찾아오겠다고 하는데, 거리도 거리지만 다들 영유아나 학생, 어르신들을 케어하는 직업을 가진 친구들이다보니 절대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나도 코로나 핑계로 가지 못했던 장례식이 있었으니까. 못가서 미안하다며 전화오는 사람들과 통화를 하다가도 손님이 오면 맞이하고 금방 다시 자리를 지키러 갔다.

 그 중 한 지인이 직접 가지 못해 미안하다며 '향불 꺼지지 않게 잘 피워드려'하고 말하는 순간 나는 고개를 들어 엄마 앞에 있는 향로를 보았고 거의 다 꺼져가는 불씨가 보였다. 나는 급하게 라이터를 찾아 향불을 다시 켰다. 나도 우리집 장례식은 처음이라 향불이 꺼지면 안 되는 걸 몰랐어. 아니, 내가 들어올 땐 이미 피워져 있었으니 이건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사실 나는 향냄새가 싫다. 일년에 열두번 엄마가 제사 준비를 할 때에도 그 향 냄새가 싫어서 방문을 닫고 들어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모르면 몰랐지 알게 된 이상, 이 향을 또다시 꺼지게 할 수는 없었다. 새 향에 불을 붙여 꺼질 때까지 시간이 어느정도 걸리는지부터 확인했다. 


 과몰입 감정형 F인간으로 살아온 지 삼십여 년. 하지만 이순간 가장 이성적인 사람은 나, 나뿐이다. 정신 차리자. 


 다음날이 삼일절이라 그런지 저녁쯤에 동생네 손님이 꽤나 많이 왔다. 동생 결혼식 때 한번 얼굴을 본 것 같은 사람도 있었고 원래 알던 동생들도 있었다. 비록 내 친구들은 아니지만 내 동생, 우리 엄마를 위해 시간을 내주었다고 생각하니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지만 고맙다는 인사를 나누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내가 연락했던 엄마 지인들도 대부분은 가보지 못해 미안하다며 문자와 부의금을 보내주셔서 동네 어르신들 말고는 엄마 손님이 더 없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였다. 너무도 익숙한 엄마의 친구가 아이고! 소리를 내며 빈소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니! 그동안 나도 아프고 그래서 못봤는데 이게 무슨 일이고!''

''오셨어요~ 코로나 시국에 그렇게 됐네요. 하하하... 앉으세요. 가깝지도 않은데 어떻게 오셨어요. 앉으세요!''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엄마 친구중에 가장 정도 많고 웃음도 많고 화도 많은 분이었다. 엄마 친구지만 내 얘기를 가장 허물없이 들어주셨던 분이기도 했다. 


''아니, 일화가, 내가, 아니, 그렇게 니 몸 챙기라고 얘기를 해도 안 들어쳐먹디만, 결국 이렇게 일찍 가네!''


 항상 웃음기 가득한 얼굴만 봐왔던지라 숨이 넘어가도록 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왜인지 나는 여전히 눈물이 나지 않았다. 일단 앉으셔서 뭐라도 좀 드시라고 했지만 물만 연거푸 들이키시고는 엄마 욕을 한참 하셨다. 


''일화 가시나가, 아파도 그냥 버티고, 쎄빠지게 일만 하고, 꺼이꺼이...''


 어느정도 진정이 되셨는지 눈물을 닦던 휴지를 손에 꼭 쥐고 식사 하시라는 나에게 되려 밥은 먹었냐고 물어보셨지만 나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말 안해도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니가 밥을 먹어야 된다. 안 먹혀도 챙겨 먹어'라며 손을 토닥여 주시고는 집에 가겠다고 하셨다. 


''집에 모셔다 드릴게요. 전에 엄마랑 한반 가봐서 대충 길은 알아요!''

''뭐카노. 나는 혼자 갈 수 있으니까 자리나 잘 지키고 있어. 밥 먹고. 알았제?''

''그래도 집이 먼데...''

''개얀타. 니는 엄마랑 있어줘라.''


 그렇게 엄마의 손님이 가시고는 나는 다시 원래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래, 아줌마 말이 맞다. 엄마 혼자 있는 거 되게 싫어 했어. 장례식장 손님 숫자도 제한하는 판국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준비한 만큼 손님이 오지는 않아서 적당히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아빠와 남동생이 격리중이라 딸 셋이 모든 절차를 의논하고 진행하고 있었는데, 어디서든 꼭 하는 일 없이 감투만 하나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듯이 우리집은 큰삼촌이 딱 그랬다.  


''여기서 움직이지마.''

''삼촌이 굳이 그렇게 말 안해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리 지키고 있는 거 나 하나 뿐이거든.''


 상주가 해야 하는 완장을 자기가 차겠다며 가져가놓고 손님 맞이는 커녕 어디 구석에서 술이나 마시고 뻗어 있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싶었다. 엄마 동생이라 순서대로 연락은 했지만 차라리 제발 그냥 집에 갔으면 했다. 걸거친다. 


 다 늦은 시간에 손님이 왔다. 어릴 때부터 삼촌이라고 불렀던 아저씨가 가게 마감을 하고 오신 것 같았다. 중간삼촌의 친구이자 삼촌들보다 우리 엄마를 더 알뜰살뜰 챙겨주셨던 분이었다. 우리만 보면 맨날 결혼을 해서 효도를 해야 한다느니 꼰대같은 소리만 늘어놓았지만 우리가 없는 동안 엄마 건강을 걱정하고 챙겨준 건 그 분 밖에 없었다. 어차피 아까 오셨던 엄마 친구분처럼 나만 알고 있는 분도 아니고 언니랑 여동생이 있으니까 괜찮겠지 생각했고 내가 엄마 앞을 지키는 동안 역시나 아저씨는 언니와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듯했다. 그 아저씨가 집에 가면서 인사하러 나온 나한테 그랬다. 둘째만 강하다고. 근데 아저씨, 나는 강하지 않아요. 나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러면서 나한테 자리를 잘 지키라고 했다. 

 다들 나한테 그렇게 말 하기로 약속 했어요? 내가 자리 지키는 사람이에요? 다들 각자 편한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에도 나는 엄마 앞을 떠난 적이 별로 없어요. 밥 한 숟갈을 먹으려다가도 향불이 꺼질까봐 별로 먹지도 못하고 다시 돌아와 자리를 지켰어요. 아저씨도 언니랑만 얘기 하다가 가잖아요. 나도 엄마에 대해서 듣고 싶어요. 왜 다들 첫째랑 아들한테만 관심이 있는 건데. 

 

 나는 그날 밤 20분마다 알람을 맞추고 새로 향을 피우기를 반복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22분 정도였다. 그렇게 알람이 울릴 때마다 새로운 향에 불을 붙여대던 나는 엄마 빈소를 지키던 그 이틀동안 20분 이상 눈을 감고 있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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