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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이아빠 Apr 30. 2024

#9. 시험에 들게 하지 마세요

시험 잘 봤어?

가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안 좋은 선택을 하기 전에 항상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은 나에게 나쁜 선택을 하게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물론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쩌면 시험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말인 것 같다. 매 순간 나는 시험을 본다.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매번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에 따라 살아간다. 좋은 선택일 수도 있고 나쁜 선택일 수도 있는 그 선택은 항상 좋을 수만도 없고 나쁠 수만도 없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지 선택에는 이유가 있다. 


중학교 3학년. 나에게는 시험이라는 무서운 선택의 순간들이 몰아쳐왔다. 매월, 매주, 매일 시험의 연속이었다. 오늘은 수학, 내일은 영어, 모레는 과학. 또 그렇게 다음 주도 반복, 다음 달도 반복, 그렇게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시험이라는 이름으로 선택은 강요되었다.


반에서 30등에 있던 나는 어느덧 20등으로 성적이 오르자 선생님들도 나란 존재를 어렴풋이 인정하기 시작했다. 등수라는 줄 서기에서 내 뒤에 있던 친구들은 그런 나를 아주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았다. 나를 힘겹고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 앞에 있던 친구들도 역시 나를 부러워하지 않았다. 자신보다 뒤처진 존재. 발버둥 쳐도 자신들을 절대 이길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우리 반에는 전교에서 1등을 하던 덕형이라는 친구가 있다. 덕형이는 항상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 덕형이의 단짝 친구는 전교에서 꼴등을 하던 종길이 었다. 두 친구는 공부를 제외하고 비슷한 점이 많았다. 좋아하는 것도 비슷했고 생각하는 것도 비슷해 둘은 항상 함께 다녔다. 선생님들은 덕형이에게 종길이와 어울리지 말라고 권유했으며, 종길이에게는 덕형이의 앞길을 막지 말라고 다그쳤다. 이해할 수 없는 둘의 관계는 전교의 관심거리였다. 


'아마 저 둘이 친척이니까 가깝게 지내는 거겠지?'

'덕형이가 삥뜯길 때 종길이가 구해줬데...'

'종길이네 집이 잘 살아서 덕형이한테 돈을 줬데..'


정말 많은 소문들이 떠돌았다.

아무도 그 두 친구가 왜 친하게 지내는지 몰랐지만 나는 그 비밀을 너무도 쉽게 알았다. 그리고 이해했다. 어떤 한순간의 선택이 나에게는 힘든 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평생 기억에 남는다는 것을 말이다.


덕형이는 국민학교 때부터 동네에서 유명한 친구였다고 한다. 나와 다른 국민학교를 나왔지만 전주에서는 꽤 유명한 영재였다고 한다.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이미 중학교 수학문제를 풀기 시작했고, 서울에서 영재학교에 입학을 권유받기도 했다고 했다. 


덕형이는 말할 때는 조금 더듬거렸는데 다른 친구들한테 듣기로는 머리가 너무 좋아서 말로 표현을 다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덕형이는 다른 친구나 선생님들과 말할 때는 매우 수줍어하고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종길이는 덕형이의 생각을 읽고 있듯이 덕형이가 한마디만 하면 나머지 말을 대신해서 이어갔다.


반면에 종길이는 공부와 머리 쓰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매 순간 장난으로 가득 찬 친구였다. 그런 장난들은 항상 친구들에게 웃음을 가져다주었다. 단체로 선생님들에게 혼났을 때 종길이는 항상 그런 선생님의 성대모사를 했고 기분이 안 좋은 친구가 있으면 재미있는 춤을 춰줬다. 우리 반의 마스코트이자 웃음버튼이었다.


종길이의 유일한 단점은 전혀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밖에 없었다. 교과서는 잃어버렸는지 항상 없었고, 숙제는 늘 해오지 않았다. 마치 이 친구만 학교에 다니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종길이가 나쁜 짓을 하거나 남들한테 피해를 주는 아이는 아니었다. 항상 공부와 시험을 지친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종길이를 모두가 좋아했다.


어느 날 선생님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종길이한테 화가 많이 나있었다. 왜 내 옆자리로 왔는지 모르지만 선생님은 종길이의 자리를 내 옆자리로 옮기라고 하셨다. 아마 내가 말이 없고 소심해서 마구 날뛰는 종길이와 내가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극과 극의 만남. 종길이는 내 옆자리로 오자마자 나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야~ 너 성적 많이 올랐다며?"

"나 볼펜 좀 빌려주라~"

"교과서 하나 더 엎냐?"

"너 무슨 동 사냐?"

"좀 있다 학교 끝나고 뭐 하냐?"


내 답변은 애초에 들을 생각 없는 듯 속사포처럼 질문을 퍼부었다. 나에게는 너무 부담스러운 친구였다. 그 후로도 종길이의 질문은 끝이 없었고 어느 날 도저히 참지 못해 종길이에게 화를 냈다.


"야~ 시끄러워 죽겠다. 그만 좀 해라. 너는 너만 생각하냐?"


종길이는 내 말에 웃음기가 사라졌고 조용히 교실 밖을 나갔다. 몇 분 뒤 종길이는 다시 돌아와 내 뒤에서 잠깐 밖에서 보자고 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때만큼은 평소 종길이의 모습이 아닌 차분하고 진지한 모습이었다.


밖으로 나온 우리는 운동장 벤치에 앉았고 종길이는 내게 음료수를 건넸다.


"자~ 이거... 마셔... 야~ 미안하다. 나는 그냥 재미있으려고 한 건데... 아무튼 미안하다"


짧지만 꽤 진심이 담긴 사과였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괜찮아... 나도 짜증 나서 그랬으니까~뭐..."


오히려 내가 갑자기 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종길이가 지금까지 물어봤던 질문들에 답하고 싶었다.


"사실 나 축구도 좋아하고 노래 듣는 것도 좋아해~"


내 말이 끝나자마자 종길이는 환하게 웃으면서 다시 원래의 종길이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진짜? 나도 축구 좋아하는데 같이 하자? 저번에 내가 축구하자고 했는데 네가 말 안 하길래 싫은 줄 알았지? 좋았어~ 내일부터 같이 하자!"


종길이의 머릿속에서는 벌써 나와 함께 축구를 하는 듯했다. 뜬금없이 종길이와 종혁이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이 순간이면 그걸 물어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야~너 덕형이랑 친하지?"


종길이는 또다시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말했다.


"아~ 그거? 히히히... 그 소문 나도 알아. 근데 뭐 별거 없는데..."


저 두 친구가 왜 친한지 나만 알고 싶어졌다. 학교에서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을 갖고 싶었다. 그러자 종길이는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 덕형이랑 나랑 옆집에 살거든. 그래서 어릴 때부터 우리 부모님이랑 덕형이네 부모님이랑 친했어. 우리 둘도 친했고. 옆집이니까 학교 올 때도... 집에 갈 때도 같이 다녔고... 그리고 그 자식이 머리는 좋은데 항상 뭘 놓고 오거든... 그래서 대신 내 거 몇 번 줬는데 그다음부터 나를 따라다니더라고... 히히히"


너무 별거 없는 비밀에 나는 놀랐다. 그리고 덕형이는 말을 이어갔다.


"솔직히 난 공부하는 거 싫거든. 난 머리 쓰는 것보다 몸 쓰는 게 훨씬 재밌고 좋아. 난 나중에 진짜유명한 삼겹살집 할 거거든. 공부야 의사 되려고 하는 덕형이가 하면 되고 난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사람마다 각자의 역할이 있다고 한다. 그 역할들을 잘했을 때 그 사회는 좋은 사회라고 한다. 덕형이도 의사라는 역할이 있고, 종길이도 고깃집 사장님이라는 역할이 있다. 아프면 덕형이한테 가면 되고 배가 고프면 종길이한테 가면 된다. 그들의 선택이 좋은 선택이라고 확신할 수 없지만 뭐 재미있게 즐겁게 신나게 살만 그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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