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했다!
이상하게 동물은 어디를 가나 서열을 만들고자 한다. 우두머리를 만들고 그 우두머리는 무리를 통솔한다. 아마도 뛰어난 우두머리 한 마리가 무리를 통솔하는 것이 훨씬 편리하다고 믿는 것 같다. 어쩌면 우두머리를 따르는 무리들은 그로 인해 안정감을 찾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는 너를 우두머리로 인정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책임은 너한테 있어. 그렇게 우리는 누구든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내 마음대로 하고 싶고 문제가 있으면 남 탓하는 것을 원한다.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이다.
나름 많은 일들이 있던 국민학교 6학년이 지나고 어느덧 중학교에 갔다. 물론 남자만 있는 중학교다. 당시에는 집에서 가까운 순으로 학교가 정해졌는데 다행인지 모르지만 우리 학교에는 국민학교를 같이 보낸 친구들이 꽤 많았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중학교는 여자아이들만 빠진 국민학교였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문제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역시나 친구들을 사귀는 것은 어려웠다. 아무리 국민학교 친구들이 대부분 중학교로 왔다고는 하지만 모르는 친구들도 꽤 많았다. 처음 보는 종류의 친구들. 원숭이처럼 항상 복도나 교실을 뛰는 친구. 나보다 더 내성적인 친구. 첫날부터 공부하는 친구. 친구들과 무리 지어 다니는 친구. 정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다양한 종류의 친구들이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도 또다시 새로운 친구를 찾아야 했다. 무리에서 살아남으려면 한 명이라도 내 편을 만들어야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3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갇혀 지내야 하는 감옥이었기 때문에 안전한 친구를 찾아야 했다. 첫날부터 소리 없는 전쟁이 시작됐다. 덩치가 큰 수컷 우두머리 후보들은 온 교실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부하를 찾았다. 마른 친구. 키가 작은 친구. 내성적이어서 내 말을 잘 들을 것 같은 친구. 원래 내 부하였던 친구. 여기저기서 수컷 우두머리 후보들은 자신들의 부하를 찾아다녔다.
우두머리 후보들이 자신의 부하들을 찾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일주만에 각 반에 우두머리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두 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다녔다. 삼총사의 법칙이 여기서도 들어맞았다.
우리 반에도 우두머리가 한 명 있었다. 석원이는 우리 중 가장 덩치가 크고 키가 컸다. 피부는 까무잡잡하고 눈빛은 항상 화가 나있었다. 석원이 옆에는 역시 두 명의 친구가 항상 따라다녔다. 그 두 명의 친구들은 언제나 석원이의 옆을 따라다니며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치우는 역할을 했다. 그런 세 친구를 선생님들은 매우 좋아했다. 무리를 통솔하는 우두머리와 그 친구들. 그들은 선생님을 대신해서 무리를 이끌었다. 어쩔 땐 선생님의 말보다 우두머리의 말이 더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아주 말았었다. 당시 나는 40킬로그램 초반으로 남자아이들 중에서는 아주 많이 왜소했다. 나는 우두머리와 두 친구들의 먹잇감이 되기 가장 좋은 외형을 갖고 있었다. 나는 약하게 보이는 다른 먹잇감 후보들과 친구가 되었다. 내 친구들은 말이 없었으나 석원이의 눈치를 보며 가끔 장난치는 것을 좋아했다.
어느 날 우리는 수업시간에 재미있는 만화책을 들려보고 있었다. 그때 석원이와 나는 눈이 마주쳤고 석원이는 눈빛으로 나에게 화가 나 있는 듯 나를 뚫어지게 봤다. 수업이 끝나고 갑자기 석원이는 내 자리로 와서 내 뒤통수를 세게 내리치며 말했다.
"야~씨.. 발... 내가 수업시간에 딴짓하지 말라고 했지? 경고했다!"
단 한 번도 석원이는 나와 말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처음 들어본 얘기다. 순간 너무 억울했다. 나는 너를 내 우두머리라고 인정한 적도 없고 나를 때리라는 권한을 준 적도 없다. 너무 억울했다.
석원이는 항상 말끝에 "경고했다!"라는 말을 붙였다.
"내가 빵 사 오라고 했지? 경고했다!"
"내가 하지 말라고 했지? 경고했다!"
"내가 오라고 했지? 경고했다!"
"내가 조용히 하라고 했지? 경고했다!"
언젠가부터는 "경고했다!"라는 말만 들렸다. 그리고 그렇게 나에게 폭력을 행사한 석원이는 마치 무리에서 벗어나려는 놈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로 보여주는 듯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수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왜 내가 맞아야 하지?'
'왜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지?'
'이건 너무 아닌데?'
"쟤는 왜 저러지?'
너무 많은 생각들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싸워봤자 내가 분명히 질 것 같았고, 말로 대들자니 때릴 것 같았다. 다른 친구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더 불가능한 방법처럼 보였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나의 두 팔과 두 다리는 어느새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 뭐지?'
생각으로는 무섭고 두려웠지만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결국 나는 내가 앉아 있던 나무와 쇠로 된 의자를 들고 엎드려있던 석원이의 머리에 의자를 내리쳤다.
"한 번만 더 때리면 그땐 진짜 가만히 안 있는다! 경고했다!"
내 일격을 받은 석원이는 아파서 교실 바닥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고통스러워하는 석원이의 모습을 보니 알 수 없는 통쾌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자연스럽게 교실을 빠져나왔고 석원이와 그 친구들을 피해 학교 구석진 곳에서 숨어있었다.
그 후 석원이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석원이와 그 친구들의 무리를 이끄는 행동은 그대로였다.
다만 나는 거기서 예외였다. 나는 무리에서 벗어나는 것에 자유를 느꼈지만 그런 나를 다른 친구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치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석원이는 공부를 잘해서인지 아니면 집이 잘 살아서인지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서울로 전학을 갔다. 아무도 석원이가 전학 가는 것에 대해 물어보지도 슬퍼하지도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그냥 원래 여기 사람이 아니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좀 아쉬웠다. 나름 통제된 환경 속에서 나 혼자 즐기는 자유가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석원이의 빈자리는 며칠이 지나지 않아 다른 우두머리 후보가 앉았다. 우두머리 옆에 따라다니던 두 친구 중 한 명이 우두머리가 되었고 새로운 우두머리는 역시 나를 건들지 않았지만 횡포는 그전보다 더 심했다.
나는 무협영화를 좋아한다. 처음 주인공은 악당에게 고통당하고 복수를 위해 강력한 무술을 배운다. 그 무술은 너무도 강력해서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 하지만 주인공은 악당과의 마지막 결투에서 그 무술을 사용하다가 악당이 죽기 전에 끝낸다. 그리고 악당을 살려준 주인공은 어디론가 멋지게 떠난다. 과연 나는 주인공일까? 악당일까? 가끔 헷갈릴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