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연차 쓰겠습니다.

by 보물정원
오늘 몸이 안 좋아서 연차 쓰겠습니다.



결국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우리 부 단체 톡방에 글을 남겼다. 사전에 얘기도 없이 연차를 쓰는 것도, 부장님께 개인적으로 전화도 아니고 개인 톡도 아닌 단체 톡방에 연차를 통보식으로 말한 것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예의가 아니라는 것도 물론 알지만 그때는 그런 걸 신경 쓸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나의 글 옆에 숫자가 하나, 둘 없어지고 분명히 톡을 봤을 부장님은 역시나 답변도 없었고 직원 중 한 명이 걱정하지 말라며 푹 쉬고 오라는 댓글을 달았다.



그 전날, 총괄부에 제출할 서류를 작성하는 문제로 부장님의 지적이 있었다. 겨우 잠재웠던 나의 심장이 또 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역시나 사소한 문제로 그의 특유한 말투로 몽당연필을 들고 그가 애정하는 메모지에 휘갈려서 할 말을 적는 그 을 보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나의 반론을 제시해도 '답정너'인 그에게는 통하지 않고 다시 작성하라는 답변만이 돌아왔고, 그때부터 숨 쉬기 힘들어 거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숨 쉬기 힘든 건 처음이 아니었다. 최근 들어 숨이 가끔 쉬기 힘들고 속이 자주 메슥거렸다. 처음부터 치료를 받았으면 이 지경까지 안 오지 않았을까? 감사실이나 외부에 제출할 서류가 있을 때마다 필요이상으로 지적을 일삼는 부장님의 태도때문에 몇 달 전부터 같은 증상이 일어나곤 했다. 내가 신입사원도 아니고 10년 넘게 이 회사에 재직하면서 제출이라면 해볼 만큼 해봤는데, 자기만의 방식을 고집하는 그의 스타일을 따라주는 게 내키지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따라주면서도 나의 내면으로부터 오는 거부감이 이런 병을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혹자는 그를 꼼꼼하다고 말을 하는데 단언컨대 그건 꼼꼼한 게 아니다. 그저 아집일 뿐.




예컨대 그가 지적한 내용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파일 제목에 날짜를 적지 마라'든지, '엑셀에 어떤 셀을 삽입하라'든지, 심지어 내 컴퓨터에 파일 저장 방식 등까지 참견을 했다. 그가 물론 모두 틀린 것은 아니고 배울 점도 있긴 했지만 본인의 방식만을 고집하고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타협이 되지 않는 그가 어린아이 같다고 해야 하나, 본인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것 같았다. 단체메일 하나 보내는 것까지 지적하는 그의 스타일 때문에 몇 분이면 끝나는 일을 그의 부재로 인해 퇴근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보내야 하는 일도 발생하기도 했다. 내가 규정에 틀린 부분(초등학생도 문맥상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 정도)을 지적했을 때나 그가 잘못 알고 있는 날짜 기입방식에 대해 알려드렸을 때처럼(심지어 행정업무운영편람의 해당 페이지를 출력해서 보여드렸다.) 명확한 걸 말을 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에 무력감이 느껴지기도 했고 그가 상사로서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그는 나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행동을 서슴없이 했었다. 내가 작성해서 보여준 글을 보면서 다른 직원을 불러와서 '얘 이거 쓴 거 봐~'라면서 비웃거나, 다른 직원의 대답을 듣고 '이렇게 대답이 나와야지~'라는 따위의 말들을 했었다. 사실 그 서류는 내가 작성한 게 아니라 당신이 불러온 바로 그 직원이 작성했던 부분이었다. ㅎㅎㅎ 난 그 직원의 후임으로서 그가 작성한 서류 중 다른 부분만 약간 수정해서 그 직원의 조언에 따라 작성한 거였다. 날짜 기입방식은 본인이 잘못 알고 있었던 거였는데 내가 쓴 방식을 지적하며 '야, 이거 창피한 거야. 창피한 거!!'라고 비웃으며 말하기도 했다. 속으로 너무 웃기면서도 화가 났었다. 게다가 귀가 예민한 나에게 그 부장의 치지직대는 음성과 반은 알아듣기 힘든 사투리 억양도 너무 나를 힘들게 했다.




몇 번 회사에서 숨을 헐떡거린 적이 있었는데 몇 시간 있으면 괜찮아졌었다. 그래서 '조심해야지'하는 심정으로 참아왔는데 그날은 평소보다 그 부장이 심하게 말한 것도 아니었는데 진정이 안 되었다. 찰랑찰랑하게 물이 가득 차 있던 유리컵에 딱 한 방울의 물이 들어가 넘치는 것처럼 그때의 내가 그랬던 건지도 모르겠다. 퇴근해서 집에 와서도 계속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잠이라면 자신 있는 나인데 그날은 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아서 거실 소파에 앉아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다가 아침이 밝아왔던 것 같다.




첫째 딸도 엄마가 너무 걱정이 되는지 연신 '엄마, 내일 회사 가지 마세요. 알았죠? 엄마 내일 회사 가시면 안 돼요.'라고 말했다. 그전에 엄마가 회사 안 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자주 하던 아이였지만 그때마다 나는 '회사는 엄마가 가고 싶다고 가고, 안 가고 싶다고 안 가는 곳이 아니야.'라고 말했었는데, 이번엔 나도 알았다고 말을 하면서 안심시키고 재웠다. 그때는 분명 평소와 달랐다. 회사가 가고 싶은 날이 어디 있겠냐만 그날은 단순히 '회사에 가기 싫다.'의 느낌이 아니라 '회사에 못 가겠다.'라는 심정이 정확할 거다. 그날 만약 회사에 갔다면 쓰러졌을 것 같다고 요즘에도 가끔 생각한다. 그날 아침의 결정을 난 잘했다고 회상한다.





결국 그리하여 굳은 결심 끝에 출근시간쯤에 카톡을 남기게 되었다.


오늘은 연차 좀 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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