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을 큰 숨을 몰아 대면서 거의 새다시피 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은 몇 가지 안 되었다. 이런 몸상태로는 회사생활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다면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받아 휴직을 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 진단서를 받자. 난 진단서가 필요해.
사실 이전에도 몇 번 부장으로 인한 억압적인 상황이 있었을 때 몇 번 정신과에 전화한 적이 있었다. 퇴근길에 들르려고 몇 군데 전화를 해봤지만 당일에는 진료가 불가능하다는 대답이 돌아왔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집 근처에 있는 한 정신과에 한 달 후로 예약을 잡아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난 지금 진단서를 받아 휴직을 해야 하니 당장 진료가 가능한 곳을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인터넷 검색창에 집 근처 정신과 중에 당일 진료가 가능한 곳을 열심히 검색했다. 그러다가 한 줄기 희망처럼 집이랑 아주 가까운 곳은 아니었지만 당일 진료가 가능하다는 정신과를 발견했다. 홈페이지도 깔끔하게 꾸며놓았고 응급상황을 위해 본인들은 당일 진료를 열어놓겠다고 공지해놓았다.
'아..내가 딱 찾던 곳이구나!' 동이 트면 여기에 가서 난 이렇게 죽을 것 같으니 진단서를 받아서 회사에 바로 제출하고 그렇게 휴직을 신청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순진하게 착각을 하면서 아침을 기다렸다.
아주 평온하게만 살아온 사람들은 정신적인 문제에 응급상황이 있다는 걸 이해는 할 수 있을까? 가슴이 너무 아프고 몸까지 반응을 하는 상황에서 어쩌면 내가 이대로 죽을 것 같다는 공포가 드는 느낌을 알기는 할까? 개인적으로 많은 위로를 받은 책인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라는 책에 '심리적 CPR'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어떻게 적절한 단어를 썼는지 딱이다 싶다. 심폐소생술이 심장의 기능을 즉각적으로 돌아오게 하여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처럼 '심리적 CPR'은 공감을 함으로써 심리적인 위급상황에서 사람을 살린다는 의미를 저자는 전하고 있다. 당일 진료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그런 병원들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다른 과보다는 환자당 진료시간이 긴 진료 특성상 예약제로 해야만 환자들의 대기시간도 줄어들고 병원 입장에서도 운영하기 편리할 것이다. 언뜻 보면 예약제로만 운영하는 곳이 합리적이어 보일 수도 있는데, 이번에 내가 직접 정신과에 가려고 알아보다가 느낀 점은 어쩌면 예약 없이 운영하는 이런 곳들이 오히려 환자들 입장에서 생각하는 병원일 수도 있겠다 싶다.
인터넷에 검색된 그 병원의 운영 시작시간은 9시 30분. 오랜만에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준비하다 보니 오픈하자마자 '땡'하면 가서 첫 번째로 진료받으려던 계획은 무산되고 9시 20분쯤 집을 나섰다. 운전을 하면서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오늘 처음 가는데요, 예약은 못 했는데 혹시 진료받을 수 있나요?"
"음...네. 오전까지 오시면 진료받으실 수는 있는데 예약을 안 하셔서 세 시간 정도 기다리실 수는 있어요."
헉!!! 세 시간?? 그치만 나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하루 종일 기다려서라도 난 진단서를 받아야 했다. 그래야 회사에 제출할 수 있으니까...그래야 날 힘들게 하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으니까..
차에 삽입된 내비게이션은 가끔 엉뚱한 곳으로 날 데려간다. 그걸 알면서도 휴대폰으로 조작하는 게 귀찮아서 매일 이용하긴 하는데 그날도 날 도와주지 않았다. 업데이트 공지가 있을 때마다 매번 하는데도 이모냥이다.ㅠㅠ 한참을 여기저기 찾아봐도 간판이 쓰여있는 곳에 불이 꺼져 있는 것 같기에 청소하시는 분한테 여쭤보니 이사 간 지 꽤 됐단다. 된장...그럼 간판이라도 떼고 겉에 확실하게 표시를 해둘 것이지, 얼핏 보면 지금도 영업하고 있는 공간처럼 겉은 말끔하게 보였다. 마지막까지 정신줄을 놓지 말자고 속으로 결심(?)하며 차에 올라서 이번엔 휴대폰 내비게이션을 켰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나의 목적지가 있었다.
이번엔 제대로 찾은 것 같았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 옆에 쓰여있는 병원 층을 누르고 내리니 바로 정면에 밝은 빛을 뽐내며 깔끔한 외관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휴~~ 이번엔 제대로 찾아왔네.
쭈뼛쭈뼛하면서 안으로 들어가 접수대에 앉아있는 여러 명의 간호사들 중 문쪽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분에게 말했다.
"저....예약은 안 했는데요."
"혹시 아까 전화하셨던 분이세요?"
"네...."
몇 가지 개인정보를 적자 신분증을 요구했다. 옆에 앉은 간호사가 나에게 마스크를 잠깐 내려달라고 양해를 구하고 신분증 속 사진과 나를 번갈아보았다. 약 20년 전, 그것도 뽀샵된 신분증 사진을 본다 한들 지금의 나랑 동일인물이라고 생각이 들겠냐만..ㅎㅎ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아마 다른 사람의 개인정보로 진료를 볼까봐 확인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따지면 다른 병원에서도 똑같은 절차를 거쳐야 맞지 않을까? 팬데믹으로 인해 오랜만에 낯선 사람에게 나의 마스크 벗은 얼굴을 보여주는 민망함이 그런 반발심이 들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든 오직 하나의 목표를 향해 그 정도는 얼마든지 참아줄 용의가 있었다. 전화로 했듯이 세 시간 정도 기다릴 수 있다고 하며 기다려달라고 했다.
드디어 내가 정신과에 오긴 왔구나. 여기가 정신과라는 곳이구나.
몇 번 망설이면서도 못 왔던 곳. 그렇지만 결국 이렇게 나이 마흔이 넘어서 오게 되고야 만 곳. 접수를 한 뒤 병원 대기실을 한 번 쭉 훑어보니 일단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살짝 다른 느낌이어서 놀랐다. 흰색 톤의 깔끔한 인테리어와 잔잔하게 흐르고 있던 클래식, 그리고 친절한 간호사들...마치 카페나 호텔에 온 것 같았다. 그리고 평일 낮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정신과라는 곳에 진료를 받으러 왔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 요즘 사람들이 스트레스가 많다더니 그래서 정신적으로 힘든 사람들이 이렇게 많나? 내 딸 또래부터 중년층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모두 다른 얼굴을 하고 대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탁자와 벽면 책장에는 다양한 환자들이 볼 수 있게 상태 좋은 책들이 준비되어있었다. 나는 그때의 상황에 책은 눈에 들어올 것 같지 않아서 1층 커피숍에서 테이크아웃을 한 카페라떼 한 잔을 마시며 휴대폰으로 뭔가를 보면서 긴장을 달랬던 것 같다.
최고조의 긴장 속에 방문한 정신건강의학과라는 병원의 첫인상은 이렇듯 나쁘지만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