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땜이라 해두자.
어김없이 시간이 지나 또 다른 새해 2024년이 밝았다. 2022년에는 정말 잔인하리만큼 나에게는 힘든 한 해였지만 2023년에는 그에 비하면 견딜만한 한해였다. 아니, 견딜만한 게 아니고 훨씬 행복한 한 해였다. 오래 다니던 직장을 결국 그만둔 것이 크다면 큰 사건이었지만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익숙한 것에서 헤어지는 것에서 오는 허전한 일일 뿐 아주 잘한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여전히 사람 만나는 게 두렵기도 하고, 전화가 오면 떨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공황장애 증상도 많이 나아졌다.
연말이 다가오자 아이들이 다니는 학원에서 하나 둘 며칠 동안 방학이라는 문자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언론에서는 해돋이를 보러 가는 차량 탓에 정체된 도로를 연신 보도했다. 아이들 학교에서 공사 때문에 여름 방학을 오래 한 덕에 아이들이 계속 학교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나는 연말이라고 어딜 가야겠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내 기억엔 크리스마스는 그렇다 치고 연말이라고 어디에 여행을 가려거나 하는 시도조차 없었던 것 같다. 코로나로 몇 년간의 공백 때문에 내 기억이 사라진 걸까? 아무리 곱씹어봐도 그런 기억은 내게는 없다.
연말 하면 나에게 인상 깊게 남아있는 기억이라고는 매년 마지막 날을 포함해 그 며칠 전부터 이어지는 온갖 방송국에서 하는 시상식을 손톱이 노래져가며 귤을 까먹으며 열심히 시청했던 기억밖에는 없다. 시골 초등학생에게 즐길 거리가 그렇게 없었다고는 해도 지금 생각하면 참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아니, 나와 전혀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상 타는 모습을 왜 그렇게 흥미진진하게 봤었는지..ㅎㅎㅎ 올해는 누가 대상을 탈 것 같다고 기대하거나, 내가 생각한 사람이 상을 타지 못하면 실망까지 해가면서 말이다.
작년처럼 아이들, 특히 첫째는 제야의 종소리를 꼭 듣고 자겠노라고 다짐을 하며 눈을 부릅뜨고 버티다가, 졸려하는 둘째와 함께 종 치기 몇 십분 전에 잠이 들었다. 언니가 자기를 재워줬으면 좋겠다며 조르는 둘째를 못 이기는 척 첫째가 동생을 재워주러 가서 잠이 든 것이다. 종칠 시간이 되면 깨워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나도 살짝 부추겼는데, 정작 자정이 다가오자 약속을 잊은 듯 첫째를 깨우지 않았다. 자다가 깨서 볼만큼 그 아이가 제야의 종 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할 줄은 몰랐다.(이건 나의 오만한 착각이었다.)
한 시간가량 지났던가, 익숙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콜록콜록,,,,,,,,콜록콜록
잊을만하면 나를 괴롭게 하는 기침소리다. 세 살 때부터 둘째가 갖고 있던 '영유아천식'이라는 놈이 둘째와 나를 꽤나 괴롭혀 왔는데, 학교에 입학한 후로는 그래도 잠잠한 편이지만 요즘처럼 미세먼지가 나쁜 날이 며칠간 지속되면 자기의 존재를 뽐내듯 알려주곤 한다. 며칠 전부터 간혹 심하지 않은 기침을 해왔던 둘째가 점점 깊은숨을 내쉬었다가 잠잠해졌다가, 또다시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가래와 함께 내뱉는 기침을 하곤 했다. 괜찮아지지 않을까 기다렸다가 안 되겠어서 도라지배즙을 하나 찢어서 빨대를 꽂아 둘째 방에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 보니 첫째가 이불을 혼자 덮고 자고 있었다.
'이래서 기침을 한 건가?'
단지 이불 때문이길 바라며 잠에 취해있는 둘째를 깨워 도라지배즙을 먹이지 못하겠어서 옆에 놓아두고는 첫째가 덮고 있던 이불을 당겨 둘째에게 덮어주니 첫째가 일어났다. 시간을 보고는 제야의 종소리는 벌써 울렸냐며 눈물이 그렁그렁한 첫째에게 얼른 휴대폰으로 유튜브를 틀어 제야의 종 치는 화면을 보여주니 나름 기분이 풀렸는지 제 방에 들어가 이내 잠이 들었다.
'아... 이제 진짜 잠을 자볼까?'
나도 다시 잠자리에 들려고 이불 깊숙이 몸을 밀어 넣었다.
그건 나의 헛된 바람이었다. 첫째가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둘째 방에서 아까와 비슷한 기침 소리가 났다가 안 났다가 했다. 나는 재빨리 예전에 쓰다 남은 호흡기 치료 약물과 호흡기 치료기기를 들고 둘째 방에 들어가 거실 쪽에서 새어 나오는 빛에 의지해 콘센트에 치료기기 플러그를 꽂고 둘째에게 갖다 댔다. 기침을 그렇게 하면 잠에서 깬 거 같은데도 아이는 여전히 잠에 취해 있었다. 네블라이저에서 나오는 약물 때문에 간지러운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둘째에게 느낌 상 1/3 정도의 약물을 쐬어주고는 방에서 나왔다.
차라리 처음부터 애가 간지러워해도 하나를 다 맡게 하고 나올걸...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기침을 한다. 나는 망설이다가 또 예전에 쓰다 남은 가슴에 붙이는 기관지 확장 패치를 까서 미리 내 손 등에 붙인 후, 둘째 방에 조심조심 들어간다. 혹시 패치가 살에 닿는 감촉 때문에 잠에서 깰까 조심조심, 그리고 신속하게 둘째의 잠옷 티셔츠를 올리고 역시 나의 감에 의존해 가슴 쪽에 붙이고 이불을 잘 덮은 후 나왔다.
'휴~~~ 이제 끝인가?'
흠... 아니지. 역시 아니었다. 또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둘째가 나를 부른다. 아까와 비슷했는지, 더 심했는지 잘 모르겠을 기침을 하며 엄마가 좀 와줬으면 좋겠다고 신호를 보낸다. 나는 아까 투입을 하다가 옆에 놓아둔 약물을 다 쐬어줄 의도로 치료기기를 들고 아까보다 조금 더 오랫동안 둘째의 코와 입에 갖다 댔다. 어두워서 약물이 다 나왔는지, 얼마큼 나왔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느낌상 '이 정도 시간이면 거의 다 들어간 것 같은데..' 하는 감과 아까보다 편해진 둘째의 숨소리로 '이만하면 됐겠지.' 하며 겨우 안심하며 다시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귀를 쫑긋 세우고 둘째 방을 향하며 또 기침소리가 나진 않는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정말 다행히 아까보다는 기침소리가 확실히 들리지 않았다. 시간을 얼핏 보니 두 시가 조금 넘은 것 같다. 내가 잠이 들어 혹시 둘째의 기침소리를 못 들으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그렇게 2023년의 마지막 잠에 들어간 것 같다.
2024년의 첫 아침에도 여전히 이쁜 두 녀석은 밝은 얼굴로 안녕히 주무셨냐 인사를 건넨다. 지난밤에 그렇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둘째는 본인은 평소처럼 잠을 잘 잤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왜 도라지배즙이 자기 방에 있냐며 의아해하며 맛있게 먹었다.^^ 여덟 시가 살짝 넘어서 일어난 둘째에게 9시부터 병원이 영업을 시작하니 서둘러 가보자고 재촉했다.
집 근처 평소 이용하는 소아청소년과를 네이버에 검색하니 감사하게도 새해 첫날인데도 불구하고 아침 9시부터 12시 반까지 영업한다고 쓰여있었다.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도 10시가 넘은 시각에 병원 앞에 도착했다. 병원 근처는 주차할 공간도 부족하고 멀지 않은 거리라 둘째랑 걸어가는 방법을 택했다. 기침을 하는 아이인데 찬 아침 바람에 걱정이 조금 되긴 했지만 '조금 있으면 약을 타고 언제 그랬냐는 듯 나아질 테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며 나 스스로를 안도시켰다.
엄마, 조금 천천히 가면 안 돼요?
짧은 다리로 따라오기 힘들었는지 병원을 바로 앞에 두고 둘째가 말했다. 원래 걸음이 빠르긴 하지만 예약도 안 받는 병원이라 혹시나 사람이 많아 진료를 못 받진 않을까 걱정이 되어 나도 모르게 너무 빨리 걸었나 보다.
어... 어... 미안해. 엄마가 너무 빨리 걸었나?
와... 어찌 됐든 드디어 도착이다. 드디어. 우리 애기 빨리 병원 가서 처방받아야지. 상가 건물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A4 용지들을 무시하며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타면서 소아과가 위치한 '3층'을 눌렀다. 상가 건물 앞부터 사람이 너무 없는 것이 이상했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짐작컨대 1층에 붙어있던 여러 장의 A4 중 하나와 같은 내용일 '새해 첫날은 휴무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종이와 불 꺼진 병원이 눈에 들어왔다. 이때의 당혹감이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왜, 어째서 병원에서는 네이버에 영업시간을 제대로 수정해놓지 않은 걸까? 씩씩대며 건물 밖으로 나와 잠깐 고민하다가 근처 병원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00동 소아과'
아... 있다. 있어!!!!!!!!!
00야. 우리 여기 한 번 가보자.
걸어서 3분 거리인 곳에 한 번도 가보진 않았지만 분명 새해 첫날임에도 영업을 하는 곳이 있었다. 둘째도 좋다고 동의하여 한 손에는 둘째 손을,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네이버 지도를 보며 병원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도 같은 상황이었다. 분명 네이버에는 '영업 중'이라고 버젓이 적혀있는데, 병원 불은 꺼져있었다. 고민하던 나는 아까 갔던 길과 다른 쪽이지만 집으로 오는 길에 있는 이 근처에서 사람이 가장 많은 소아과로 향했다. 걸어가면서도 반 정도는 포기를 한 상태에서 혹시 몰라 네이버를 검색해 보니 거기에는 그래도 가장 친절하게 '휴무일'이라 적혀있어서 엘리베이터를 타기 직전 바로 나올 수 있었다.
아.. 어떡하지? 고민하던 나는 아이가 다음 날 학교에도 가야 해서 어떻게든 그날 병원을 가서 약을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집에서 차를 타고 20분 거리에 있는 대형 소아과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도 두 번 정도 가본 병원이지만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대기시간이 길어서 웬만하면 가지 않으려고 했던 병원이다. 그렇지만 이번엔 달리 방법이 없어서 검색해 봤는데 예약이 다 차있을 것으로 미리 겁먹은 것과는 달리 다행히 오후 2시 반에 네이버로 예약이 가능했다.
예약도 완료했겠다 집에 가서 점심을 여유 있게 먹고 병원으로 향했다. 지난번에는 예약 없이 가서 오래 기다린 것과는 달리, 편리한 문명의 이기 덕분에 여섯 명의 아이들이 진료를 본 후 우리 아이 차례가 되었다. '숨소리가 생각보다 좋지 않네요.', '항생제를 먹어야겠어요.', '기침을 일부러라도 계속하게 하세요.'라는 의사의 조언을 듣고 병원을 나와, 역시 생각보다 많이 기다리지 않고 받은 약을 들고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병원 진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힘이 쫙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새해가 되었다고 '짠'하고 엄청 대단한 일이 일어날 거라고, 아주 즐겁고 환상적인 이벤트가 펼쳐질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그저 평범하고 조용한 하루가 되길, 그냥 그렇게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할 수 있는 흔한 날이었길 바란 게 욕심이었을까? 며칠 전부터 한 살 더 먹는 게 신기한지 '엄마, 저 이제 며칠 후면 0살이에요?'라고 묻고, 그날 아침에도 일어나 호기심 많은 얼굴로 '엄마, 저 달라진 거 없어요?', '저 몇 살처럼 보이세요?' 하며 묻는 천진한 아이에게 꼭 이런 새해 첫날이 되었어야 했나. 정말 무언지 모를 대상에 따지고 싶었다.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가끔은 모든 게 내 잘못인 것 같아 슬프고 나의 무능력에 좌절을 느끼기도 한다. 세 살 때부터 응급실에 간 적도 있을 만큼 그 아이의 거친 숨소리는 나를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두려움에 빠뜨린다. 얼마나 많이 그 아이 대신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고 기도를 했었는지... 아이를 재울 때마다 으레, 때로는 아주 의식적으로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자라줘.'라고 속삭였는지...
액땜이라 생각하고 싶다. 새해 첫날부터 이렇게 우리를 놀라게 했으니 나머지 날들은 그 어느 해보다 평안할 거라고 믿고 싶다. 한 살 더 먹었으니 우리 아이들이 조금 더 튼튼해지리라 진심으로 바란다. 2024년에는 꼭 그럴 수 있을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