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폐차까지

이 정도면 미국 있는 내내 삼재

by yesomeday

그런 날이 있다.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했던 하루인데 계획에 없던 일들로 잊지 못할 날이 되어버린


미국에 온 지 3년 차에 막 접어들 때였다.


금요일 저녁, 퇴근하고 온 남편과 함께 오랜만에 five guys를 갔다가 근처 샘스클럽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바로 갈까 하다가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 마지막으로 집을 한번 더 보고 싶었던 날


밤에도 조용하고 안전해 보이는 하우스 단지를 보고 미국에서의 남은 2년 동안 펼쳐질 하우스 생활을 기대하며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집에 다 와갈 때쯤 문득 근처 마트에서 파는 달고 맛있었던 포도가 생각이 나 목적지를 집에서 마트로 바꿨다. 이제는 내비게이션 없이도 찾아갈 만큼 수없이 지나쳤던 익숙한 길.


그날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그냥, 목적지만 바뀌었을 뿐.




우회전을 하면 집, 직진을 하면 마트로 향하는 사거리였다.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자 출발했는데,

맞은편에 있던 차가 예상치 못한 경로로 오더니 순식간에 굉음과 함께 충돌했다.


우리는 교차로에서 직진을 하고 있는데, 절반쯤 지났을 때 반대편 차선에서 비보호 좌회전을 하려던 차가 깜빡이도 켜지 않은 채 돌진한 것


차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을 때, 찰나의 순간에 '저 차가 왜 이쪽으로 오지? 부딪칠 것 같은데..' 생각하며 브레이크를 밟았을 때는 이미 충돌한 이후였다.


에어백이 터지고 무슨 일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사고 직후에 계속 앞으로 움직이는 상대편 차를 보며 든 생각은 하나밖에 없었다.


'저 차를 잡아야 하는데... 도망가면 안 되는데..'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차가 멈춰 섰고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차 사고가 났고, 복부가 아프긴 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고

조수석에 타고 있던 남편도 충돌로 인해 안경이 날아가기는 했지만 움직이는 데 이상이 없었다.

사고는 낸 상대편 운전자도 패닉에 빠져 계속 울고 있었지만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정말 운이 좋았던 건 신호가 막 바뀌어서 속도가 빠르지 않았고, 우리 뒤에 따라오던 차가 없었다는 것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하며 서둘러 경찰에 신고를 했다.


어설픈 영어 실력으로 사고 접수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경찰과 구급차가 도착했다.


경찰은 간단히 사고 경위를 물었고, 계속해서 느껴지는 복부 통증에 남편과 함께 인생 처음으로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로 향했다.


응급실에 가기 전 사고 현장에서 만났던 상대편 운전자의 부모가 말하길

운전면허를 딴지 이제 3일 된 17살이라고... 사고 이후부터 내내 울고 있어서 어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20대겠거니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더 어렸고, 사실상 운전 경험이 거의 없는 초보였다.


그렇게 새로운 집 계약을 앞두고 차 사고가 났다.


겉으로 봤을 때 크게 다친 곳이 없었던 남편은 남아 있는 병실이 없어서 간이 의자에 앉아 있다가 알약 몇 개만 주고 끝이었고, 나는 복부에 멍이 들고 통증이 계속 있어서 CT를 찍었다.



응급실에서 잠시 안정을 취하고 CT 결과 이상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늦은 저녁 집으로 가려는데,

집 열쇠가 없었다.


가방이나 열쇠를 모두 차에 놔두고 구급차에 실려 바로 병원으로 왔다 보니 열쇠를 챙길 시간이 없었다. 사고 접수한 경찰서에 문의하니 차는 이미 정비소로 옮겼고, 정비소는 문을 닫았다.

다행히 정비소 직원과 전화 연결이 돼 다음날 아침에 차 안에 있는 짐을 가지러 가겠다고 이야기는 해 놓았는데 당장 갈 곳이 없었다.

휴대폰으로 서둘러 근처 호텔을 예약하고 우버를 불러 호텔로 향했다.


인생 첫 교통사고라니.. 그것도 미국에서.

사고 현장에서 받았던 사고 경위서를 작성하면서도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실감이 나지 않았고,

짐 하나 없이 호텔에서 잘 생각을 하니 허탈했다.


불안과 미묘한 안도감이 뒤섞인 밤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남편 회사 동료의 도움으로 정비소에서 짐을 찾아 무사히 집에 도착했고, 조금 쉬다가 사고 경위서를 제출하러 경찰서에 다녀왔다.

경찰을 만나기 전 혹시나 우리의 주장이 왜곡되거나 잘못 전달될까 봐 사고 경위서를 빼곡히 적기도 했고, 어떻게 얘기해야 될지 걱정을 많이 했는데, 걱정이 무색하게 사고는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고 명확하게 얘기해 주셨다.

여전히 막막했지만 아주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Police Report Number 받아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사고 발생 지점과 관련 운전자 및 차량 정보, 위반 티켓 발부 여부 등을 담은 보고서(Police Accident Report)는 해당 기관의 웹사이트를 통해 조회할 수 있습니다.


우린 사고 다음날부터 어깨와 목, 무릎 등 통증이 느껴졌고, 증상이 심하진 않았지만 몇 개월간 물리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변호사를 선임했다.


이제부터 기나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미국에서 교통사고, 그 후

한국은 교통사고가 났을 때 보험사에 연락하면 알아서 처리해 주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다.

주말에는 업무를 하지 않고, 평일에도 전화 연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상대방 과실이 명확했기 때문에 우리 보험사가 아닌 상대방 보험사를 통해 보상 여부를 논의했는데, 변호사는 메디컬 관련 보상만 담당하고, 차량 관련 보상은 직접 보험사와 소통해야 했다.


보통 미국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에어백이 터졌다면 폐차(Total loss) 처리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우리 차 역시 충돌 당시 앞 좌석 모두 에어백이 터진 상태라 결국 폐차해야 했고, 차 상태를 점검하는 동안 빌렸던 렌터카는 폐차 결정 후 3일 이내에 반납해야 했다.


이 말인즉슨, 차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미국에서 사고로 차를 잃어도 보험사가 렌터카를 무상 제공하는 기간은 최대 일주일 남짓이라는 뜻이다. 폐차가 결정되고 3일 안에 새로운 차를 산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물론 한 가구에 여러 대의 차가 있다면 괜찮을 수도 있겠지만 차가 한 대뿐이던 우리에겐 너무 가혹한 현실이었다.


폐차가 확정되면 보험사는 현재 집주소 기준 100마일 이내에 있는 비슷한 조건의 차량 시세를 참고해 보상금을 산정한다. 처음 제시된 금액은 터무니없이 낮았고, 결국 우리가 직접 온갖 중고차 사이트를 뒤져 유사 차량의 높은 시세를 찾아 전달했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는 처음보다 2-3000불 정도 더 받을 수 있었다.


미국에 와서 산 새 차를 2년 만에 잃고, 결국 중고차를 샀다.


그리고 2025년 10월,

사고가 난 지 1년이 훌쩍 넘었는데 아직도 사건은 종결되지 않았다.

변호사의 능력 탓인지 미국의 느린 일처리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교통사고가 나면 온라인에 공개된 사고 리포트를 보고 여러 로펌으로부터 수많은 러브콜을 받게 된다.




keyword
이전 09화미국에서 집 구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