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나의 아지트, 마음의 고향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자유 시간이 생기거나 뭔가 마음의 안정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습관적으로 종각에 있는 영풍문고에 갔다.
누군가는 그러한 순간 부모님이 계신 고향집을 찾거나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산을 찾거나,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은 바다를 찾을진대
책을 좋아하는 나는 책방이나 도서관을 찾곤 했다.
이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나 같은 인간유형이 많이 없기도 하거니와 특히 내 주위에선 한 명도 보지 못했기에, 살면서 누군가에게 수용 되어지고 이해받았던 경험이 없었던 나는,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고 위안을 얻었던 것 같다.
누군가는 나에게
"넌 왜 속마음을 얘기 안 해?"
"니 얘기 좀 해봐~너무 내 얘기만 한 것 같아"
라고 얘기하곤 했었지만, 꾸역꾸역 정리하고 가다듬어 얘기를 꺼내 보아도 돌아온 말들은
"왜 그런 생각을 해~그런 생각하지 마"
"뭘 그렇게까지 생각해"
와 같은 종류의 말들 뿐이었기에, 이내 그 말들에 더욱 상처받아 말을 꺼내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곤 그럴수록 내가 듣고 싶은 말들을 상대에게 해 주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
"맞아, 네 마음 이해해 속상했겠다"
나는 공감능력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나 또한 공감받고 싶어 하는 한 명의 인간에 불과할 뿐이었다.
내가 뭐라고, 상대방의 그 복잡 미묘한 감정들을 모두 헤아릴 수 있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그리고 내가 듣고 싶었던 말들을 그저 되돌려 주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동네 책방에서 고르고 골라 책을 사면 표지를 투명한 포장지로 예쁘게 포장하고 안에 넣어 주시던 책갈피 하나, 새 책의 냄새와 반들반들한 그 느낌이 참 좋았었는데, 언제부턴가 동네 책방들과 레코드점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라진 책방의 빈자리는 영풍문고나 교보문고 같은 대형 서점이 차지했다. 아니, 그런 대형서점에 밀려 동네 책방이 사라진 것이 맞는 순서다. 지금은 온라인 서점에 밀려 대형서점 마저 위태로워지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뿐이지만.
광화문과 종각은 기껏해야 한두 정거장 차이고 우리 집에서는 차라리 광화문이 가까웠지만, 사람 많고 복잡한 교보문고보다는 인테리어는 조금 투박해도 한가롭고 조용한 영풍문고가 나와는 잘 맞았던 것 같다.
베스트셀러가 진열되어 있어 최근 유행하는 책이나 보고 싶었던 책을 한눈에 볼 수 있고, 책도 책이지만 지하 2층에 내려가면 예쁜 팬시용품들을 구경하는 맛이 쏠쏠했다.
국민학생 무렵부터 동네에 작은 팬시용품점에 들어가 한 바퀴 돌며 구경하고 용돈을 모아 예쁜 쓰레기를 하나씩 구입하는 게 나에겐 큰 힐링 포인트였는데 그렇게 큰 공간 가득히 자리 잡은 예쁜 아이들이라니.
보고 있자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곳에서 연말을 앞두곤 크리스마스 카드를 사거나 새해 다이어리를 살 때면 '올 한 해도 이제 끝났구나'느끼곤 했다.
푸드코트나 카페도 있어서 다른 일정이 있지 않는 한 하루 온종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었다.
20대 후반 언젠가 그곳 카페에서 소개팅을 한 적이 있었는데, 약속장소를 서점으로 잡았던 나를 외계인 보듯 쳐다보던 그의 표정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하하. 나 같은 사람은 처음 본다나.(흠, 저도 본 적 없긴 합니다만, 너무 대놓고 말씀하시면..)
이런 곳에 카페가 있는 것도 처음 알았단다.
작년(2023년) 12월 초. 서대문역 근처 인창중학교에서 JLPT 시험을 보곤 아주 오랜만에 영풍문고를 찾았다. 마지막으로 갔던 것이 7, 8년은 훌쩍 넘었던_
지하 1층은 비교적 비슷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지하 2층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우선 푸드코트나 카페, 그나마 작게 자리 잡고 있던 음반 판매점은 싹 사라지고, 무지 같은 쇼핑몰이 자리 잡고 있다. 다행히 팬시용품과 문구용품을 파는 코너는 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치 어릴 적 뛰놀던 동네가 재개발이라도 된 것처럼 왠지 마음이 허전했다.
일요일이라 그랬겠지만 종각역의 전반적인 느낌도 많이 변해 있었다. 주말이면 더욱 활기차던 모습도 사라지고 여기저기 문을 닫아 휑한 거리의 모습이었다.
'그래.. 벌써 20년 가까이 됐으니까..'
종각에서 영어학원을 다니고, 종종 친구들과의 모임을 하기도 했었던 게 벌써 15~20년 전 일이다.
내가 한창때 유행했던 음악이나 영화, 드라마들을 돌이켜 보자면 어느새 모두 20년은 훌쩍 넘어 있어 새삼 나이 먹었음을 실감하곤 했으니. 세월은 붙잡을 겨를 없이 참으로 빠르게도 흘렀다.
아직까지 서울에 살았더라면, 지금도 틈만 나면 영풍문고를 찾았을 텐데 김포로 이사 온 지금은 그곳에 가기 쉽지가 않다. 그래서 일부러 시험 장소를 서대문으로 잡기도 했고, 아주 오랜만의 추억과 감성에 젖어 발걸음을 옮겼던 그날. 설렘과 마음 한편 씁쓸함으로 마주 했던 그곳.
종각 영풍문고.
영원한 나의 아지트, 나를 오롯이 서게 했던 마음의 고향으로 남아 주었으면 한다.
사라지지 말아 줘.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