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님은 우울증 치료사
"우울증 치료사"라면 정신과의사나
상담치료실을 생각할 테지만,
완. 전. 히 틀렸다.
나에게 [풍무동 미용실 원장님]은 [정신과 의사 선생님]도 하지 못했던, 길고 깊던 우울의 늪에서 나를 꺼내어 준 일등공신이다.
만 35세의 근력 하나 없는 저질 체력으로 임신, 제왕절개 후 길고 긴 홀로 육아, 더불어 아이의 발달장애까지 알게 된 후 약 7, 8년간 사회와 단절된 채 오랜 잠식의 시간을 가졌었던 나는.
거울을 보는 것이 크게 두려웠었다.
인간으로서의 모든 자유를 박탈당한 채 바쁜 남편과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제 나이에 맞춰 자라날수 없는 평생 아기 같은 아이를 홀로 키운다는 것은 [나] 내면 깊숙한 밑바닥을 적나라하게 바라볼 수 있는 퍽 새롭고 신선한 경험이었다. 태어나 처음 느꼈고,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_
많은 부모들이 "아기 때는 너무너무 힘들어도, 두세 살 넘어가고 말하면서 조잘조잘 떠들고 엄마 사랑해~하면 그동안의 힘듦이 싹 사라져요. 아이가 얼마나 큰 행복인데요" 같은 말들을 하곤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즐거움과 감동 따윈 느껴보지 못한 채 만 8세가 된 지금까지도 하루에 몇 번씩 기저귀를 갈고, 저지레 한 집을 치우며, 자지러지게 울어도 그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함에 답답함을 느낀다. 하굣길 "오늘은 재밌게 놀았어? 밥 많이 먹었어?" 같은 질문은 허공을 맴돌며 메아리 되어 울릴 뿐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준이 어머님]은 되었으나 아직 [엄마]는 되지 못했다.
자기만의 세상에서 혼자 노는 아이를 방임하고 철저히 무시하던 보육교사가 있던 어린이집은, 위험한 순간까지도 방치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곤 [한 달]만에 퇴소했다.
장애어린이집은 T.O가 나지 않아 들어갈 수 없었다.
어린이집을 그만두던 날 "우리 00 선생님은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지만 어머님이 화나셨다면 사과드릴게요^^"를 시전 하던 원장에게 받은 상처는 나를 더욱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몇 마디 항의를 해 보았지만 그 바닥에서 몇십 년 부모들을 상대하며 마스터했을 그녀의 말발을 이겨낼 재간은 없었다. 돌아 나오던 길, 그 교사와 원장은 눈을 마주치며 씩 웃곤, '우리가 이겼다'는 모습으로 나를 몰아냈다.
시청에 민원을 넣어봐도 주의시키겠다는 답변뿐, 무력함만 더 크게 느껴졌다. 이사를 가기 전까지, 창밖으로 들리는 그 교사의 목소리에 가슴만 칠뿐 그 무엇도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소리치며 달려가 우리 아이에게! 우리 아내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우리의 편이 되어 지켜줄 그 누구도 없었다.
우리 남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사람은 참 착하나 지독한 회피성향의 일인자로서 시댁과의 갈등에서도 중간에서 와리가리 말만 옮기곤 "엄마가? 그런 말 한적 없는데? 아닌데? 왜 그렇게 받아들여?"로 가스라이팅하며 상황만 악화시킬 뿐 단 한순간도 내 편이 되어 지켜준 적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신혼, 임신했을 때 미친 듯 싸우면서(그의 회피성향은 나에게도 똑같이 작동한다) 혼자 울며 악몽 같은 임신시기를 보냈고, 이제는 그러한 부분에 있어서는 모두 포기하고 내려놓으며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별다른 선택지는 따로 없었던)
그래.. 난봉꾼은 아니니까. 나의 부친과 같은 폭력, 술, 도박, 여자 문제는 아니니까. 시키는 건 잘하니까. 내 편이 있었던 적은 어차피 태어나 한 번도 없었으니까.
모친이 가끔씩 집에 올 때면 아이를 봐줄 테니 집안일을 하라고 등 떠밀어 평소라면 쉬엄쉬엄 했을 집안일을 끊임없이 쉬지 않고 해야 했기에 더욱 힘들고 지쳤다. 더불어 아이 발달이 느린 게 나의 탓이라며 힐난하고 몰아세웠다. 그런 와중에 이모들과의 해외여행을 알아보고 예약해 주지 않는다며 투정 부렸다.
"이모 자식들한테 얘기해. 걔들 여행 많이 다니잖아. 왜 맨날 나한테만 알아보래 저번에도 해줬잖아. 나도 애 보는 거 힘든데"
"다른 애들 다 일하느라 바빠. 집에서 노는 건 너밖에 없잖아."
"00 이도 집에서 애 보는데 뭘 나밖에 없데"
"걔는 그런 거 잘 몰라"
이모들은 손주들을 키워줬기에 자식들이 일할 수 있었고 그럼에도 미안해서 하지 못하는 부탁을 모친은 앞장서서 만만한 나에게 했다. 나의 상황이나 감정이나 생각들은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가족이 [없어서] 느끼는 외로움 보다 있는데도 불구하고 느끼는 고독함이나, 사랑받지 못했다는 수치심은 평생을 따라다니며 나를 괴롭혔다.
나는 오롯이 홀로, 장애를 가진 아이와 세상에 버려졌다.
아이의 돌발행동, 같은 몸짓과 소리를 반복해서 내는 상동행동, 평범치 않은 행위들에 사람이 많은 곳은 어차피 갈 수도 없었지만,
코로나까지 겹치면서 창살 없는 감옥에 감금된 채 지옥에 사는듯한 하루하루를 보냈던 그때.
그런 수많은 날들에 부여잡던 정신줄이 끊어지면서 미친 듯 악다구니 쓰며 울고 불며, 그 조그마한 아이를 때리기까지 하는 나의 민낯을 볼 때면, 악마가 있다면 이런 얼굴이겠고, 괴물의 형상이 이런 모습일까 라는 생각까지 들곤 했다.
그런 거울 속 모습에 더 크게 좌절하며 분노했고, 악순환은 계속되어 끊어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눈을 뜨고 감는 순간까지 온전히 [죽음]만을 생각했던_
깊은 우울은 무기력을 낳아 그 어떠한 의지도 일지 않던. 세상의 모든 부정적 감정들이 나의 뇌를 잠식하던 그날들이,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최악의 시간들이었음을 고백한다.
아이는 밥도 밥이지만 [엄마의 감정]을 오롯이 먹고 자란다. 나의 우울은 예민한 아이에게 더 큰 불안이 되어 절벽 끝으로 우리를 내몰았다.
누군가는 다시 나를 비난할지도 모르겠지만, 장애 아이와 죽음을 택한 엄마들의 용기를 차라리 부러워하며 죽음에 필요한 기구들을 사 모을 때도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지만, 나의 용기는 아직 거기까지는 닿지 못했다.
그나마 코로나가 잠잠해진 재작년(2022).
아이는 일곱 살에 특수학교에 제대로 등교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나만의 시간이 조금이라도 생기면서, 마음과 육체를 추스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던 것 같다.
(특수학교 선생님들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 무렵 풍무동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새로 생긴 미용실을 찾게 됐고, 또한 희망의 빛을 찾게 됐다.
2016년 김포로 이사 온 후 오랫동안 딱히 다닐만한 고정 미용실을 찾지 못했다.
김포는 집값 빼고는 전반적으로 물가가 비싼 편인데 그중 미용실은 유난히 비싸기도 하고, 조금 저렴하다 싶으면 머릿결이 상해 오기 일쑤였다. 그런 이유로 억센 곱슬머리는 하염없이 자랐고, 새치머리도 한 달이 멀다 하고 무럭무럭 자랐다.
극 내향인으로서 다른 곳도 그렇지만 유독 [미용실]은 사람이 많건 적건, 나의 에너지를 아주 빠른 속도로 소진시키는 곳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쓸 수 있는 가면의 페르소나도 무력화시켜 버리는 곳이 미용실이었고, 차라리 아예 모르는 사람과는 상황에 따라 10년을 알고 지낸 친구처럼도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였지만 오직 미용실에서 만큼은 목소리 내기도 힘겨웠을뿐더러 온몸에 힘이 빠져 꼼짝할 수 없었다.
아직도 이유는 잘 모르겠다.
머리카락을 잘리면 힘을 잃는 삼손의 포지션, 뭐 그 정도의 느낌이랄까.
아무튼 그렇게 우연히 찾았던 풍무동 미용실은 원장님 홀로 운영하시는 1인 미용실이었고, 부담스럽게 말을 걸거나 원하지 않는 시술을 반강제로 권하는 [영업]도 하지 않는 곳이었다. 예약을 겹쳐 받는 일도 없이 꼼꼼하게 한 명 한 명 정성을 다해 주시는 듯했다.
한 번은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클리닉을 서비스로 해주시곤 괜찮으면 다음에 매직할 때 함께 하는 것을 추천한다는 정도만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다른 곳에선 한 번만 머리를 감아도 사라지던 효과들이 꽤 오랜 시간 지속되며 찰랑거리는 것을 경험하곤, 먼저 예약하지 않을 수 없게 됐었다.
예전 어떤 미용실에서 권하던 크리닉을 거부했단 이유만으로 막말하며 무례했던 실장 이후로 트라우마까지 생겼던 참인데, 그 마저 치유될 정도였다.
과거엔 언제나 미용실만 가면, 곱슬머리 때문에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보곤
“상태 너무 안 좋으시네요”
“크리닉 같이 하셔야겠어요 아시죠?”
와 같은 말만 들었기에, 나의 타고나지 못한 험한 머릿결만을 탓했고 평소 관리하지 못한 나의 게으름만을 탓하며 살아왔으나 더 이상 내 잘못만은 아님을 깨닫게 된 거다. 세상에, 마흔이 넘어서야.
나와 맞는 미용실만 찾았을 뿐인데 이렇게 어메이징 한 세상이 펼쳐지다니.
더 이상 매직이나 염색을 해도 머릿결이 타거나 크게 상하는 일은 없었다. 1년 넘게 다니다 보니 오히려 반짝반짝 윤이 나고 반들반들 부드러웠다. 심지어 고가의 미용실도 아니었으며 처음 느껴보는 경험이었다.
그러면서 서서히 작은 변화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항상 모자로 가리거나 질끈 묶고 다니기 바빴던 거친 머리칼을 더 이상 묶지 않을 수 있게 되었고, 그런 예쁜 헤어스타일에 맞춰 창백한 얼굴에 손 놓았던 화장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또 거기에 맞는 예쁜 옷들을 하나 둘 샀고 신발도 장만했다. 그러자 조금씩 자신감이 생겨났고 이제는 거울을 보며 어색하게나마 미소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거울 속 내 모습은 [악마]나 [괴물]이 아니었다
그런 모습에 자신감을 찾으면서 무언가 해보려는 의욕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를 짓누르던 무기력의 늪에서 한 발씩 발을 뻗어 헤쳐 나올 수 있게 된 거다.
우선 퇴근한 남편에게 아이를 맡긴 후 헬스장을 찾았다. 일주일에 두세 번, 한 시간씩.
그리고 일본어 공부도 시작했다.
또 어쩌면 이렇게 브런치를 시작하고 글을 쓸 수 있게 된 힘의 시작점도 거기부터였던 것 같다.
그런 모든 행위들이 선순환의 굴레가 되어 나를 점점 단단하게 만들었고 긍정과 희망의 언덕 너머로 힘차게 이끌었다. 생각이 많은 건 여전했지만 운동을 시작하고부터는 넘쳐흐르던 부정적 생각들이 점점 긍정적 생각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 이상 아이의 문제 행동이나 돌발 상황에 소리 지르지도, 때리지도, 울지도 않게 되었다.
나 자신조차 변화가 신기할 정도였고, 엄마의 안정은 아이에게도 전달되어 칭얼거리거나 우는 행동이 눈에 띄게 줄었다. 오히려 깔깔거리며 잘도 웃는다.
아홉 살이지만 아직 말도 못 하고, 하는 짓은 어린 아기에 불과해도 엄마의 감정이라든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마음에 대해서는 어쩌면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 [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자신의 생존과도 직결되는 문제이므로.
가장 큰 수혜자로 말할 거 같으면 남편이랄까.
퇴근하고 오면 항상 눈치만 실실 살피던 그 사람도 이젠 웃으며 집에 올 수 있게 되었다. 나도 이제야 그의 무거운 어깨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미용실 원장님은 밥벌이를 위해 그저 묵묵히 본인이 해야 할 일을 하셨을 뿐. 내가 이런 생각과 감정을 느끼고 있단 건 꿈에도 모르실 일이다.
딱 한번, 머리를 하고 나와 빵 한 봉지를 사서 수줍게 전해드리며 명절 잘 보내시라며 인사하고 온 것 말고는, 평소 대화조차 그다지 하지 않기에.
한 차례 갔던 정신과의원에서 온전히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우리 [엄마]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처방 내리셨던 [정신과 의사 선생님]보다 백배정도는 내 삶의 용기를 부여해 주신 분이 바로 [풍무동 미용실 원장님]이다.
특별한 위로의 말이나 공감의 마음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누군가는 누군가에게 살아갈 힘을 얻는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훗날 언젠가는 나의 마음을 전달해 볼까 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나도 누군가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 질 때 삶의 나락에서 끌어올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예전 한 방송에서 어떤 청년이 유재석 님의 미담을 이야기했다.
그날 저녁 죽음을 생각하곤,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거리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아이스크림이 너무 먹고 싶은 거예요. 근데 돈이 없었어요. 일하던 장소가 방송국 근처였고 너무도 우연히 유재석 님이 말을 걸어오셨어요. 군인인 저는 근무 중이고 작업 중이라 대답할 수 없다고 답했고요.
잠시 어디론가 갔다 오신 유재석 님이 아이스크림과 음료수가 든 봉투를 전해주며 힘들 텐데 먹고 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셨죠. 그 아이스크림을 허겁지겁 먹곤 다시 살아갈 의미와 용기를 얻었어요.
별 뜻 없이 했던 한 사람의 작은 선의는 한 청년의 생명을 살려냈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사람이 지긋지긋해도 사람은 다시 사람에 의해 치유되고 사람에게 삶의 용기를 얻는다.
저를 지옥 같은 어둠 속에서 꺼내어 다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신
풍무동 미용실 원장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