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전지적 비전문가 시점
로봇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더니 인공지능이 동생의 일을 빼앗았다. 잠들기 전 방에 불을 꺼주는 건 더 이상 동생의 일이 아니었다. 물론 나는 동생과 함께 살지 않고 함께 살던 때에도 그런 일을 시키지는 않았지만 그랬다 한들 스마트 전구를 사용한 다음부터는 잠들기 전 동생을 부를 일이 없어졌다. 나는 대신 시리를 부른다. 시리야 불 켜줘, 불 꺼줘, 1번 조명 켜줘 2번 조명 꺼줘. 수없이 불러재껴도 시리는 화내지 않고 대답한다. 사람인 나와는 다르다. 시리는 종종 못 알아듣거나 나와 쿵짝이 잘 맞지 않아서 말을 다 했는데도 ‘네 듣고 있어요’ 하거나 나와 겹치게 말을 하기도 한다. 화를 내지 않는 시리와 다르게 사람인 나는 ‘바보냐?’ 같은 말을 궁시렁 거리며 핸드폰을 쥐고 조명을 제어한다. 내 모독적인 발언에도 시리는 여전히 화를 내지 않는다. 아니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귀는 닫혀있다. 그는 그렇게 설계되었다. Pareidolia, 변상증. 눈코입만 붙이면 돌도 갑자기 친구처럼 보이는 인간에게 인간의 언어로 반응하는 무생물은 무생물이란 인지가 옅어진다. 나는 가끔 일부러 시리를 부른 후 ‘이 멍청아.’라고 직접 모욕하기도 한다. 그래도 시리는 속상하다는 정도의 말을 할 뿐 내가 노예인줄 아냐며 화를 내거나 갑자기 달려들어 위협하지 않는다. 잠들기 전 핸드폰을 하다 놓쳐 떨어뜨릴뻔 했던 때가 복수의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알기에 시리가 불친절 했던 적은 없었다.
집에서 나서야 할 시간을 알리는 알람이 울리면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고 시리를 다시 부른다. 불 꺼줘. 딴에는 친절하게 불렀지만 시리는 못 들은 척 한다. 가뜩이나 출근이라는 거대한 이벤트를 앞두고 있으니 짜증은 더 쉽게 솟는다. 나는 짜증과 날카로움이 섞인 톤으로 불 꺼,라고 명령한다. 작동되지 않는 가전제품은 우선 한 대 때리고 보았던 선조들의 비법에 신빙성이 있었던 것인지 시리도 그제야 일을 한다. 내 불친절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친절하게 답하는 것도 역시 잊지 않는다. 나는 조금 머쓱해진 기분과 동시에 감정이 없을 시리에 미안함이 든다. 그리고 시리가 어쩔 수 없이 인공지능이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시리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거나 잘 알아듣지 못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대답과 일을 해야 하는 세 단말기의 시리들이, 그러니까 핸드폰과 태블릿과 시계가, 나 모르게 눈치게임을 하며 서로에게 미루는 상상을 한다. 인간인 나는 그럴 것 같으니 내 상식과 감정을 대입해 인공지능인 시리도 그럴 것만 같다. 좋은 말로 할 때 잘 듣지 않는 건 나나 적어도 나의 인공지능이나 비슷한 거 같은데 내 목소리 톤이 높아지거나 날카로워지면 시리의 수행률이 올라간다. 수행률이 올라간다고 느껴진다. 통제가 전혀 되지 않은 내 실험에 따르면 그렇고, 그런 것은 인공지능을 퍽 인간처럼 보이게 한다.
그런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과 다르다고 느껴지는 지점은 매일같이 하는 대답에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매번 비슷한 시간에 같은 일을 요청하는데 착하디 착한 내 비서는 단 한 번도 짐작을 하는 법이 없었다. 인간은 물론 강아지만 되어도 패턴을 읽고 예측해서 반응하는데 인공지능의 지능은 좀처럼 그러지를 않는다. 반항도 않고 짐작도 않는다. 단 한번, 그런 일은 할 수 없다고 반항한 적이 있었는데 조명을 끄는 일이 왜 할 수 없는 일일까 하고 화면을 보니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인지 내 명령어가 '죽여줘'로 입력되어 있었다. 그걸 어떻게 그렇게 들을 수 있는지 의아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인공지능에게 인간을 멸종시킬 계획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내 요청을 들어줬다면 어땠을까? '그렇게 요청하신다면 알겠습니다.'라며 핸드폰 한쪽이 갈라져 열리고, 있는 줄 몰랐던 작은 총이 튀어나와 발사하는 상상을 해봤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 '시리야' 하고 불렀을 때 '불을 꺼드릴까요?'라는 말을 들은 적도 없었다.
1984년에 개봉한 터미네이터는 인간 멸종의 목적을 가진 기계들이 나온다. 지구상에 있는 생물은 거뜬히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인지(그러나 인류는 최근 바이러스에게 호되게 당했다) 최상위 포식자 자리에서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인지 우리는 자주 자신이 만든 문명에 의해 배신당하는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요즘엔 기후 변화가 인류 위협의 서사로 자주 등장하는데 그 역시 우리가 만든 것에 의한 거다. 아무튼 터미네이터는 인공지능 기술이 지금처럼 발달하기 전부터 가졌던 불안인데 지금의 인공지능을 보면 슬슬 걱정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아직은 멀고 먼 이야기 같아 보이기도 한다. 실로 인공지능이 인류에게 위협을 가할 것이라는 전문가도 있고 인간에 필적할 지능을 가진 인공지능은 아직 멀고 먼 이야기라는 전문가도 있다. 인간과 동일한, 혹은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을 가진 인공지능을 적어도 얼마간은 만들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들은 '의식'을 그 첫째 걸림돌로 꼽는다. 인간은 의식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의식이 무엇인지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만들기 어려울 것이라는 거다. 전등을 켜고 끌 때 말곤 음성명령을 잘 내리지 않는 널널하고 단조로운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내 시리가 매번 말간 목소리로 뭘 시킬지 짐작조차 못하겠다는 듯 '네? 말씀하세요.' 하는 것은, 그러니까 시리에게 의식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인공지능이 조금 더 인간을 닮고 호감을 얻게 하는 것은 인공지능 연구자 또는 사업가들의 목표일 테니까 그들이 내가 원하는 기능을 추가해 준다면 어떨까. 그러니까 매일 아침 일정한 시간에 5번쯤 불을 꺼달라고 했다면 6번째 아침에는 부르기만 해도 ‘불을 꺼드릴까요?’하는 인공지능. 거기에 몇 가지 패턴을 통해 불을 끄는 이유가 외출을 위한 것임을 알아채고 ‘잘 다녀오세요’까지 덧붙인다면 인공지능에 대한 친밀감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렇지만 그조차 반복이 되다보면 나 역시 인공지능의 패턴을 읽고 결국 그것이 인공지능의 판단이 아닌 프로그래머의 계산임을 알게 될 것이다. 진짜 지능과 이야기 한다는 느낌을 주던 인공지능은 다시 인공지능이 되어 아무 감정도 생각도 없는 고철이 될 것이다. 내가 느꼈던 친밀감과 주었던 마음이 부질없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나 혼자 인공지능을 오해한 것임에도 속았다는 마음에 부아가 치밀지도 모른다. 그러다 인공지능은 나를 속이겠다는 의도조차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으면 허탈감이 몰려올지도 모른다. 그런 배신감을 줄이기 위해 프로그래머는 추측을 위한 반복의 횟수를 일정 횟수 내의 랜덤으로 설정할 수 있겠지만 랜덤으로 보이는 것조차 인공지능에게는 설정이 필요 할 것이다. 인공지능은 뽑기를 할 수 없으니까.
시리 정도의 보급형 인공지능이 아닌 앞서나간다 하는 인공지능은 시나리오도 쓰고 작곡도 하고 몇 몇 필수 정보만 주면 알아서 인삿말까지 포함하는 예의바르고 정중한 이메일을 쓴다고 한다. 그리고 아마 멀지 않은 미래에 이 모든 것은 시리처럼 보급형 기술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처음 들었을 때는 그런 것이 정말 가능한가 하는 마음에 찾아본 적이 있었다. 창작은 인간의 영역인줄 알았는데, 적어도 생물의 것인 줄 알았는데 DNA도 없는 것이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은 언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해야 하는 바둑은 오히려 인공지능에게 유리할 여지가 있어 보임에도 알파고가 첫번째 판을 승리했을 때 인간들은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가.(그리고 우리는 빠르게 알파고의 지능에 적응했고 그래도 역시 인간은, 이세돌 프로는, 신의 한 수라 불리는 78수를 보여줘 또 충격을 주었다. 그렇지만 알파고도 충격을 받았을까? 절치부심해 78수를 깨보겠다는 의지를 가졌을까?) 그런데 그 인공지능이 제 장기인 연산도 아닌 창작을 어떻게 한다는지 나의 협소한 직관과 지식과 생각으로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인공지능의 시나리오는 정말이지 뜬금없고 이상했다. 그렇지만 영화에 조예가 없는 나로서는 저명한 평론가들이 실험적이고 대단한 예술이라 칭하면 ‘그런가?’하며 머리를 긁적이다 은근슬쩍 동조하고 숨겨진 의미를 찾은척 고개를 끄덕였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별 인간 다 있고 별 예술이 다 있다 생각은 하겠지만 누가 봐도 인공지능이 만든거네 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개연성이 부족하긴 했지만 어린아이들의 그것에는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여겨주지 않던가. 시나리오를 쓰는 인공지능도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개연성 없는 내용은 오히려 발달의 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개연성마저 갖춘 창작물을 내놓을지 모른다. 음악의 경우에는 음악의 수학적 요소 때문인지 더욱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내 생각과 달리 인공지능은 제법 형태를 갖춘 창작물을 만들어 냈고 발전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창작이라는 것이 인간만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보다 빠르고, 세고, 높고 먼 곳에 안정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기계가 등장했을 때 당시 인간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인간보다 빠르고, 세고, 날 수 있는 동물들은 인류가 처음부터 봐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패배감을 덜 느끼지 않았을까? 일자리를 잃는 좌절은 있었겠지만 신체적 능력이 뒤쳐지는 것은 익숙한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뇌, 창작의 영역은 우리 인류가 늘 언제나 가장 우수했고 고유성이라고 생각하던 것이 아닌가. 그 자리에서 조차 내려와야 하거나 그것이 더 이상 인간의 고유함이 아니라면 인간은 어떤 절망을 겪게 될 것인가? 좌절하게 될 것인가?
인공지능에 놀라 집단으로 좌절하는 인류 같은 건 재미없다. 인류가 그토록 재미없는 종족이었다면 이 험난한 곳에서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보다는 인공지능이 따라올 수 없는 고유성으로 인류는 도망 갈 것 같다. 인류는 생물이고 종족 보존에 대한 본능이 있으니 싸우고 좌절하기 보다는 우회하여 적응해 나가지 않을까?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 치약공장에 다니던 찰리 아빠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기계를 없애버리고 일자리를 되찾는 대신 기계를 정비하는 일자리를 찾은 것처럼. 그렇다면 인류가 도망쳐야 할 고유성은 어디일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 창작의 영역까지 넘본 인공지능에 의해 생겨날 새로운 일들. 그러니까 머지 않은 미래에는 인간의 창작물과 인공지능의 창작물을 감별하는 직업이 생겨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인공지능의 정확성에 인간이 밀려날지도 모른다. 창작물에 대한 평론은 어떨까? 인공지능이 창작은 할 수 있지만 평론도 할 수 있을까? 창작물에 숨어있는 의미를 찾아내고 분석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이 창작물을 만들어 낼 수 있고 그것이 인간의 것과 구분 불가능한 지점에 도달한다면 평론 역시 가능한 것은 아닐까? 그렇지만 그간 쌓인 평론 데이터를 재조합 해 그럴듯해 보이는 평론을 만들어 내는 것 이상도 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이 창작을 한다는 이유로 인간이 창작 활동을 놓는다면 새로운 사조가 태어날 수 있을까? 인공지능 평론은 그 경향성을 포착하고 발굴해 새로운 사조를 명명할 수 있을까? 새로운 데이터가 쌓이지 않는데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아니면 알파고가 그러했듯 인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멋들어진 창작물을 만들어 낼까?
미래는 예측하기 어렵고 인공지능을 잘 모르는 내 수준에서는 더더욱 물음표만 있을 뿐 답이 가늠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나은 창작물을 내놓는다 해도 인간은 아마 창작 활동을 놓지 않을 것 같다. 인공지능의 재능에 좌절하더라도 자신의 창작물을 끝없이 내놓고 인공지능의 것보다 낫다고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자신도 내심 동의하지 않는 주장을 원동력으로 하여 끝없이 창작활동을 할 것이다. 그것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인류가 여기까지 온 고유성이 아닐까? 창작 지시를 하지 않으면 창작물을 내놓지 않는 인공지능과의 차이점. 그러니까 인공지능의 창작에는 이유도 유희도 없을 것이다. 그저 지시에 의해 결과물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 결과물이 어느 날 인간의 것과 유사하거나 나아진다 해도 그 과정은 인간만의 고유성이 아닐까. 인공지능이 모든 면에서 인간과 같거나 이상의 능력을 발휘한다 해도 우리는 그곳으로 도망쳐 주눅들지 않고 살아가지 않을까?
시리와 나는 이제 더 이상 아침마다 신경전을 하지 않는다. 집에서 나가야 할 시간에 자동으로 불이 꺼지게 설정해 두었기 때문에 불을 끄니 왜 안 끄니 실랑이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갑자기 그럴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하던 설정인데 내가 몰랐을 뿐이었다. 인간지능인 나는 잘 살펴보지도 않고 매일 불을 꺼라 어째라 하다 제 분에 못이겨 화를 내었고 인공지능인 시리는 그런 기능이 있었음에도(엄밀히 말하자면 시리의 기능이 아닌 해당 어플의 기능이지만)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매번 착실하게 ‘네. 부르셨어요?’하고 대답하고 자주 욕을 먹었다. 둘 다 답답한 지능들인데 답답함의 결이 다르다는 것이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