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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연이 Feb 12. 2023

다이어트 중독

영원히 헤어 나올 수 없는

다이어트도 중독이다. 한번 빠져들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 나에겐 금주보다 다이어트가 더 어렵다.


20대 땐 탄수화물 중독이었다. 그러면서도 살을 빼겠다고 안 해본 다이어트가 없다. 다이어트에 관한 책과 비디오는 모조리 사 들였고, 뭐든 시도는 잘했다. 하지만 다이어트 책에 나오는 식단은 오래 유지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식단관리를 하지 않으면 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한다 해도 효과를 볼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딱 한번 원하는 몸무게까지 살을 뺀 적이 있었다. 처음 항우울제를 먹기 시작하면서였는데 아마도 부작용으로 식욕부진이 있었던 모양이다. 부작용이 나에겐 축복과도 같았다. 그때 나의 주 식사는 옥수수와 떡이었다. 점심 겸 저녁을 옥수수 2개와 모싯잎떡 4개로 든든하게 먹고 이후로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한 끼라도 배불리 먹으니 견딜만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을 갔는데 결혼 전 남편이 일하던 곳과 가까워 같이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먹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돌아왔다. 샌드위치를 먹고 집에 와서 뭘 더 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지하철을 타고 올 때마다 네 정거장 전에 내려서 집까지 걸어왔었다. 그 결과 말랐다 싶을 정도까지 살을 뺄 수 있었다. 친한 친구들 대부분이 큰 키에 마른 몸을 유지했기에 그제야 친구들 앞에서 자신감이 생겼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가 다이어트에 집착하게 된 계기가 친구들 영향도 있을 것이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통통했던 친구도 대학교에 들어가더니 늘씬해졌다.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친구도 여럿 있었고 다른 데는 통통해도 다리가 늘씬해서 부러웠던 친구도 있다. 그 속에 있으니 더 조바심이 났었나 보다. 하체 비만에 배까지 많이 나와서 친구들과 더 비교가 되었다. 보이는 곳에만 살이 안 찐다며 나에게 비겁한 몸매라는 말을 한 친구도 있었다. 나는 하체에 비해 상체가 날씬한 편이었고, 그 친구는 상체에 살이 잘 붙는 편이었으니 서로가 부러울 만도 했으리라.


스물아홉 살에는 기념으로 친구들이 다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 그것도 배꼽티를 입고. 나의 최대 콤플렉스가 뱃살이었으므로 정말 나는 빠지고 싶었다. 나름 단기간에 살을 뺀다고 뺐는데 나의 배는 납작한 친구들의 배에 비해 유독 돋보였다. 배에 온 힘을 주었지만 튀어나온 배를 감출 수 없었다. 남몰래 치욕스러움을 느꼈다.


결혼 전에는 레몬 디톡스 다이어트를 했다. 하지만 겨우 2kg 빠진 것이 다였고, 통통한 신부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가 너무 후회된다. 조금만 더 악착같이 노력했으면 좋으련만. 친구들은 결혼식 때 더더욱 날씬함을 과시했고, 절정의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었다.


지금은 그게 뭐?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뭐? 결혼식 때 통통한 신부로 사진을 남겼다고 해서 뭐가 어쨌다는 거야? 지금 내 모습에 충실하지 못하고 여전히 과거의 후회 속에 사로잡혀 나를 좀먹는 후회들. 아무 도움도 안 되는 과거의 사진들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난 왜 그때의 상처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지금까지 껴안고 사는 걸까?


20대 이후 친구들에게 열등감이 자리 잡았다. 어쩌면 그전부터 열등감은 나의 일부가 되었는지 모른다. 아빠 없는 아이로 자라 가난한 집에서 공부도 못했던 잘난 거 하나 없는 아이. 바꿀 수 있는 건 외모밖에 없다고 생각해 다이어트에만 열을 올렸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자리 잡은 박탈감과 열등감 때문이었을 수도.


여전히 열등감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것이 나를 장악하게 두지는 않는다. 잘난 거 없는 것은 똑같지만 나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다. 남들과 똑같이 살지 않는 것에 우월감을 느낀다. 나의 삶이 옳든 틀리든 스스로 쌓아온 가치관들이 지금의 삶의 방식을 만들었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 않는 것이 독특한 삶을 만든 것 같기도 하다. 부류에 휩쓸리지 않고 나만의 길을 갈 수 있게 된 것은 비교할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지금 다이어트에 집착하는 것은 몸에 밴 오랜 습관과 스스로 만족할만한 몸을 유지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남과 비교하는 걸 넘어 이제는 내가 만족할 수 있는 몸을 갖고 싶은 것이다. 이것도 올바른 생각은 아니다. 스스로 정한 몸무게가 과연 합당한 걸까? 수없이 다이어트에 실패하면서 열등감이 과열되고 좌절하며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흔적이 여전히 내 몸 곳곳에 남아 있다. 그 상처들이 나를 부추긴다. 이제야 원하는 몸무게를 얻게 되었으니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고. 계속 노력하고 유지해야 한다고.


왜곡된 생각과 편견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아마도 나는 영원히 다이어트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다이어트는 나의 일부가 되었다. 난 임신해서도 맘껏 먹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강박적으로 걸었다.


며칠 전 예능을 보니 한 가수가 살이 오른 모습으로 나왔다. 10년간 관리를 해왔으니 자신을 놓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낀다. 먹방을 보며 그러하듯 그를 보며 위안을 삼는다. 나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음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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