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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연이 Apr 23. 2023

화병이 나지 않는 이유

‘미운 우리 새끼’라는 프로그램에서 김종국 씨가 상담받는 걸 봤다.

김종국 씨는 나와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상담을 들으니 나와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놀랐다.

강박적인 성격에 주변 사람을 통제하려는 것과 정해진 일과에서 벗어나면 욱하는 성격까지 나와 들어맞았다.


나는 깔끔하게 정리, 정돈을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물건이 없으면 짜증부터 난다.

대부분은 다른 가족들이 아무 데나 놓은 것이지만 내가 무의식적으로 다른 곳에 놓고 모를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너무 당황스럽다.




남편은 즉흥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갑자기 스케줄이 변동되는 걸 너무 싫어한다.

그래서 연애 때도 그 문제로 자주 다퉜다.

내가 생각해 놓은 하루 일과가 있는데 거기서 벗어나면 멘붕이 오고 화가 난다.

모든 상황을 통제해야 하는데 돌발 상황이 생기면  불안해서 짜증부터 나는 것이다.

늘 같은 길로만 다니고, 같은 메뉴만 먹고, 외출 전 동선을 수없이 머릿속으로 되뇌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겠다.

운전을 하면서 남편이 지름길을 알려줘도 난 내비게이션의 말만 믿는다.

내비게이션은 친절하게 차선을 변경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을 통제하려는 성향이 강하다는 말도 너무 와닿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의 테두리 안에는 가족밖에 없다.

친구조차 쉽게 집에 초대하지 못하는 것은 나의 테두리 안에 친구를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래된 친구조차 나의 집안에 들이지 못하는데 살면서 나의 집안에 들일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나의 통제력이 나의 가족에게만 국한된 것은 다행일 수 있겠지만 나의 삶은 외롭다.

누구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다는 건 계속 이렇게 외롭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은 이렇게 사는 것이 마음 편하지만 곧 아들들은 독립해 떠나갈 테고 내 집안에는 나와 남편만이 남을 것이다.


남편마저 이미 나의 영역 안에서 벗어났는지 모르겠다.

신혼 초에는 남편의 귀가 시간이나 술 마시는 횟수를 통제하려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지만,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그럴 시간에 잠이나 더 자는 게 낫다는 걸 깨달았다.

남편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은 꼭 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술 마시지 않고 일찍 들어오겠다는 약속은 밥 먹듯 깨어졌고, 육아와 집안일은 모두 나의 몫이 됐다.

남편에 대한 신뢰는 점점 무너지고 어느 순간 술 마시고 늦게 들어와도 남편에게 전화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의식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남편에게 너무 무관심하게 된다.

남편은 통제당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이 편하면서도 자신을 챙기지 않는 것을 서운해한다.

지금 나에겐 아이들과 고양이 ‘봄이’가 일순위고 남편은 몇 번째 순위인지 모르지만 열외 상태다.


나의 집안에 편히 들이지 못하는 사람 중에는 나의 엄마도 포함되어 있다.

가족이고 심지어 엄마인데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나의 집에 들일 수 있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기만 할 뿐 늘지 않는다.

나의 집은 작디작은 캡슐호텔 같다.

사실 오랜 친구들조차 들이지 못하는 건 온전히 나의 문제다.

하지만 남편과 엄마를 들이지 못하는 건 쌍방과실이 아닐까 싶다.


집안일과 육아가 모두 나의 몫인데 이 상황에서 내가 남편까지 잘 챙겼다면 진작에 화병이 났을 것 같다.

우리 부부가 계속 평화롭게 살아가려면 난 남편을 통제하면 안 되고 남편은 나에게 내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올바른 부부의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이 최선이다.

내가 화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는 이유.

남편에게 잘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남편을 자유롭게 풀어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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