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건 안될 일이다"
"아버지~이"
"어디 할 짓이 없어서 남의 남자를! 아무리 금과옥조라 해도 안 되는 거야!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제 눈에선 피눈물 나는 법이야!"
"아버지, 저도 안 돼요. 그 사람아니면 안 된다구요"
"이 정신나간 년! 남자가 없어서 처자식이 있는 남자한테 빠져? 내가 니들 그리 키웠냐? 내 시골에서 올라와서 딸자식 가리지 않고 교육시키고 이만치 살때까지 남한테 못할 짓 한 적 없다. 그런데 니가 그렇게 살면 안된다"
"아버지, 허락해 주세요"
"내가 허락한다고 안 될 일이 되는 것 아니다.. 너 정신 차리고 잘 생각해 봐라. 니가 어디가 모자라는게 있어서 처자식 있는 놈한테 그러는 거냐? 서울 시내에 그 놈보다 못한 놈이 없다. 세상 천지 지 처자식한테 못할 짓 하는 놈만큼 몹쓸 놈도 없는 거야. 애들 그만큼 키울 동안 그 놈이 곁눈질한게 너 하나겠냐? 동네 시끄럽게 요란법석을 떨며 오토바이 끌고 올 때부터 알아봤지. 하고 다니는 꼬라지는 또 어떻고?
"이미 끝난 가정이예요. 오죽했으면 다른 여자를 만나겠어요? 그 사람은 제가 잘 알아요. 나쁜 사람 아니예요. 애엄마랑은 진즉에 끝난 사이라구요"
"그게 니가 될 수도 있는거야. 사내놈들이 다 거기서 거기인 거야. 너처럼 얼빠진 것들이 그런 닐리리 같은 놈들한테 홀려서 인생 망치는 건 줄 몰라? 안 된다. 절대 안 돼. 내 자식이 남의 가정 파탄내는 꼴은 못 본다. 내가 아무리 시골에서 일찍 올라와서 안 해본 장사없고 안 겪어본 일 없지만, 남한테 나쁜 짓은 안 했다. 절대 안돼"
"아히히~ 그럼 저 나가서 죽어요. 죽어버릴지도 몰라요"
"그래? 그래 이 년아. 이 마할년. 차라리 죽어라. 어디 할 짓이 없어서 남의 서방을 뺏으려고 해. 나가 죽어 이년아!"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풍자는 악다구니를 치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허락 아닌 허락을 받는다면 일이 성사될 수도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국민학교에 다니는 딸이 셋이 있었다. 아들도 낳지 못한 며느리가 마뜩치 않았던 그의 어머니는 대차고 활달해 보이는 풍자를 마음에 들어했다. 위풍당당한 모습을 닮은 사내아이를 안겨줄 것만 같은 기대감에 얌전히 살림을 꾸러나가고 있는 며느리를 어떻게 쫓아낼까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래. 나이가 어떻게 되우?"
"스물 한 살이예요"
"오호~ 부모님은?"
"서대문 근방에서 해장국집을 하세요"
"그래? 우리 경남이랑은 어떻게 알고?"
"같이 일하고 있어요"
"호호, 그렇게 만났구나. 전에는?"
"상업은행에 다녔어요"
"그래?"
반지르르하게 윤이 나는 머리카락을 바짝 묶어 틀어올린 쪽 진 머리에 갸름한 얼굴을 갸우뚱 하고 있는 노부인 앞에 앉은 풍자는 싫은 소리를 듣더라도 끝까지 버텨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무늬가 거의 없는 흰 치마 저고리르 입어서일까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흰자 사이로 또렷히 보이지 않는 눈동자는 차고 날카로운 검처럼 느껴졌지만, 내내 호호 웃으며 입술에 엷은 미소를 띤 채 자신을 뜯어보고 있었다. 싱싱하고 좋은 것이라면 고등어든 복어든 가리지 않는 듯한 눈빛이었다.
풍자는 그 날카롭고 서늘한 눈빛을 개운하게 받아들였다.
부인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다고 했다.
아들도 못 낳는 여자의 죄 때문에 남편이 젊은 여자가 생겼다고 했을 때 시어머니와 손 위 시누이는 그 서늘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니가 무슨 할 말이 있느냐? 집 안에 보탬도 안 되는 것이 무슨 며느리 노릇을 하려냐" 며 머리채를 끄들렀다.
남편은 을지로에서 소문난 멋쟁이였다. 잠깐 잠깐 바람 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자리를 내놓으라고 한 적은 없었다. 얼마나 잘난 여자이길래 아들 낳을 똑똑한 여자라고 하는지 궁금해서 그 여자네 집이라는 곳을 찾아가 멀찌감치 들여다 보았다.
손님이 끊이지 않게 드나드는 음식점. 미닫이 문의 문지방이 반들반들 윤이 나 있었다.
'이만치 사는 집 딸이 뭐가 아쉬워서...'
누구라도 붙잡고
"이 집 딸이 내 남편을..."이라고 신세한탄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고 걸음을 돌렸다.
풍자는 이미 한 편의 허락을 받았다는 안도감과 쉽지 않을 이야기를 꺼내야하는 걱정에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평생의 인연을 만났고 그가 지금은 가정이 있지만 그 자리는 곧 내 것이 될거라는 약속을 받았다고 한다면 자식 이길 부모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정 그럴거면 나가 죽어라. 이 년아. 내 너같은 파렴치한 인간은 자식 아니라고 치고 살 거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울며 불며 메달리면 마음이 누그러질 법도 한데,
다른 자식도 아니고 일평생 기쁨만 안겼던 내가 선택한 건데
끝까지 반대하진 않겠지. 그렇더라도 내가 좋아서 같이 산다는데, 그 쪽 집에서는 좋다고 환영하는데 그러면 됐지.
풍자는 그 길로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쳇, 나도 이제 성인이예요. 내 인생이라구요. 나 좋아하는 남자, 내가 좋아하며 살면 그만이지 않아요? 그 사람이 내가 좋다는데. 잘 봐요. 내가 얼마나 행복하게 잘 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