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에 빠진 소녀
'마포 나룻터를 지나 조금 더 걸어내려갔다. 땅이 질퍽하기도 하고 모래가 섞여 있어서 걷기가 힘들었다. 발이 미끄러져서 넘어질 뻔하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을까 말까 고민했다. 그 아이는 손대신 내 손목을 잡아주었다. 조금 더 걸어가니 바위 틈이 있었다. 그 곳에서 나란히 앉아서 물소리를 들으니 꼭 동굴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칫, 엄마! 아버지!"
명자는 읽던 부분에 손가락을 두고 표지를 덮었다. 더는 두고 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엄마! 이것 봐요. 명희가 남학생이랑 동굴에 갔대요!"
"뭐?"
통이 넓은 잠방이를 입고 작은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던 아버지의 커다란 눈에서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뭐하는 거야? 이리 내! 남의 일기장을 왜 훔쳐보고 그래!"
"지금 일기장 훔쳐 본게 중요해? 남학생이랑 동굴에 간게 말이 되니?"
"동굴은 무슨 동굴이야? 그냥 바위 그늘이었어!"
"어쨌든 남학생이랑 둘이 간 거잖아!"
"아니야! 다른 애들도 있었다구"
"거짓말하지 마. 단둘이 갔다고 적었잖아"
"아니라구! 그냥 일기를 그렇게 쓴 거야"
"그냥 그렇게 쓴 게 어딨냐? 벌써부터 연애나 하고 다니고 말이야!"
"칫, 니 걱정이나 해. 내가 연애 먼저 할까봐 샘나냐?"
"뭐어~?"
"그만들 못 해?"
바느질 거리를 내동댕이 치며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리 내 봐. 너 진짜 남학생이랑 둘이 동굴에 갔어?"
"마포에 동굴이 어딨어? 애들하고 다같이 교회 끝나고 놀러간 거예요"
"동굴이 왜 없어? 바위그늘 밑이 다 동굴처럼 움푹 들어가서 어두컴컴한데에"
명자는 약이 오른 것인지 약을 올리는 것인지 모르게 흥분해 있었다.
"거 뭐하는 거야? 그리고 너 지금 어디 가니?"
외출하려는지 가방까지 메고 있던 명희를 보고 아버지가 물었다.
"숙제하러 교회 가요"
"맨날 숙제하러 간다고 하고는 애들이랑 놀러 다닌대요"
"그럼 어떡해? 미션스쿨에 다니는데 교회도 안가면 나 숙제 못한단 말이야"
"너, 진짜 숙제하러 가는 거지? 허튼짓하면 못 쓴다"
"네, 아버지. 진짜 아니예요. 애들하고 다 같이 바위 밑에 잠깐 앉아있다 온 거예요"
"그래, 조심히 다녀와라. 해 지기 전에 들어오고"
집 안 식구들 중 누구도 교회는 커녕 절에도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가끔 할머니가 인왕산에 올라가서 기도드릴 때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절에 치성을 드리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 굿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서대문 사거리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던 명희가 더 좋은 학교에 시험 쳐서 학교를 옮겼을 때는 아무도 미션스쿨이라는 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일과 중에 성경을 읽고 찬양도 하는데다, 채플 시간이 따로 있어 가끔은 시험도 보는데 명희는 성경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재학생과 선생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거나 아버지가 목사인 아이들이 많아서 다른 아이들은 선생님이 무슨 얘기만해도 고개를 끄덕이는데 명희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고맙게도 매 주 아버지가 목회자인 친구들의 초대를 받아 여러 교회에 갈 수 있었다.
가장 친한 친구인 영선이는 사람들 앞에서 멋지게 피아노 반주를 하며 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명희도 영천 시장 안쪽 골목에 살 때 피아노를 배우게 해달라고 엄마를 졸랐던 때가 있었다.
잘 먹어서 살이 통통하게 오른 복각집 손녀는 둥글둥글 맨들맨들한 인형같았다. 매일 같이 사람들이 미어 터지게 줄을 서 있는 복각집 2층에서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렸다. 복각집 손녀가 오동통한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는 것이 부러워서 엄마를 졸랐었는데, 피아노 선생님하고 얘기 나누고 나온 엄마는 손을 내저으며 그런거 가르칠 돈이 없다고 했다.
보내줄 때까지 떼를 써볼까도 했지만, 밑으로 동생이 셋이나 있고 언니도 학교 다니는데 피아노까지 어떻게 배우냐며 단호하게 얘기하는 엄마를 이길 수가 없었다.
명희는 복각집 손녀가 가방을 들고 피아노를 배우러 다니는 모습을 괘씸하게 지켜봤다.
복각집 손녀보다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더 잘 칠 수 있을텐테 우리집이 복각집이 아니라서 피아노를 못 배운다고 생각하니 밉고 화가 났다.
영선이는 전쟁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엄마랑 둘이 산다고 했다. 전매청에 다니는 아버지가 있는 명희도 배울 수 없는 피아노를 어떻게 배웠나 궁금해서 물었더니 ,
"교회 다니면서 배웠어. 우리 교회에서 후원해줘서 난 대학도 피아노를 전공할 거야"
"교회에서 대학도 보내줘?"
"응, 우리 아버지가 전쟁때 돌아가셨잖아. 그래서 교회에서 죽 지원을 받았거든"
"그렇구나. 우리집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미션 스쿨 다니는 것도 나 뿐이야"
"명희야 , 오늘 학교 끝나고 외삼촌 댁에 심부름 가야하는데, 너 나랑 같이 다녀올래? 말죽거리까지 가야 하는데 너무 멀어서 혼자가기 그래서 그래"
"그래? 알았어. 어차피 너랑 나랑 집도 가까우니까 같이 다녀오자"
버스를 타고 흑석동을 지나 한강을 건너, 한참을 달려 도착한 영선이 외삼촌 댁은 흙먼지가 날리는 길가에 있는 초가집이었다. 앉아서 인사치레를 나눌 새도 없이 용건만 전하고 돌아오는데 벌써 날이 어두워졌다.
"어떡하지? 너무 멀어서 벌써 해가 진다. 늦어서 버스도 끊긴것 같아. 삼촌이 배 타고 가야 된다는데 미안해"
"괜찮아. 더 늦기 전에 빨리 가자"
이정표도 없는 흙길은 걸어도 끝이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나루터는 보이지 않고 길 양쪽으로 키가 훤칠하게 큰 갈대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배도 끊기면 안되는데 어쩌지?"
"조금 빨리 걷자"
"어?"
멀리서 마차 소리가 점 점 가까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빈 마차 한 대가 명희와 영선 옆에 가까이 멈췄다.
"너가 영선이니?"
"네"
"삼촌이 배 끊길까봐 타고 가라고 부탁하더라. 얼른 타라. 나룻터까지 태워줄게"
"네? 감사합니다"
명희와 영선은 마차를 타고 갈대숲 사이 길을 달렸다. 덜커덩 덜컹 편편치 않은 길을 달리는 마차바퀴가 요동칠 때마다 엉덩이가 들썩였지만 걷는 것보다 빨리 달려 저 멀리 넘실대는 강물이 보였다.
"우리 피날갈 때 마차 타고 갔다고 했는데"
"그랬어? 우리도 마차 타고 갔다고 엄마가 그랬는데, 으아~ 걸어갔으면 정말 얼마나 힘들었을까?"
"으드드드 ~~~마차도 편치는 않다. 그치? 하하하하"
"막배요?"
"네! 어서 와요"
사공이 배를 막 띄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혹시나 하고 마지막 손님을 기다리던 차라고 했다.
"휴, 다행이다. 집에 못 가는 줄 알았네"
"나도, 엄청 긴장했어. 내일 학교 못가면 어쩌나 걱정했어, 나 때문에 멀리까지 오고, 미안해"
미아리 쪽으로 가는 영선이와 헤어져서 명희는 서대문 사거리 길을 따라 걸어왔다.
잠깐이었지만 머나던 다른 세상에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학교와 집을 오가는 매일의 익숙한 풍경에서 벗어나 경험한 일탈이 왠지 마음을 설레게 했다. 날은 이미 컴컴해져서 가로등 빛이 도로를 밝히고 있었다. 가로등은 커녕 먼지 날리던 흙길에 초가지붕을 얹은 영선이네 외삼촌 댁과 겨우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니.
명희는 오늘도 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 속으로 한 줄 한 줄 써내려 가며 영천길을 걷는 부분까지 쓰다보니 벌써 대문을 스르륵 열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어딜 갔다 이제 오니? 너무 늦었어"
엄마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명희의 마음 속에 남아있던 걱정과 불안, 낯선 긴장감이 낙수처럼 튀어올라 사라져 버렸다.
"응~ 영선이가 외삼촌네 심부름 간다고해서 말죽거리 다녀왔어요"
"뭐어? 거기가 어디라고, 겁도 없이 그 먼 길을 다녀와? 너 아주 혼나야 겠어. 들어와 어서!"
아이쿠. 명희는 순간 낭만에 빠져 있던 자신을 원망했다.
좀 전까지 포근하고 다정했던 엄마 목소리가 지붕이 들썩일 정도로 쩌렁쩌렁 울리는 듯 했다.
"다 큰 애가 미친놈 개 쏘다니듯 돌아다니고 있어. 겁도 없이. 어서 들어와!"
불이 켜진 건넌방에서 사르륵 사르륵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