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사람들

을지로 멋쟁이

by 은의 정원

잿빛갈색 바지 위로 무릎 아래까지 올라오는 가죽 부츠를 신고 가죽 점퍼의 지퍼를 가슴까지 올린 채 들어서는 남자의 모습은 영화 속 인물을 연상케 했다.

극장 간판에 내걸린 마후라를 두른 공군 비행사가 걸어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거북이처럼 목을 늘인 얼굴에서 튀어나올 듯 쌍꺼풀진 눈 사이로 도드라진 눈동자는 명동 거리를 반들반들하게 쓸고 다닌다며 혀를 찼던 젊은이들과 어울리지 않을것만 같은 나무 대문을 하나의 그림으로 담아내기 어려워 힘을 주고 있었다. 반면 영순은 잃어버린 소중한 물건을 발견한 듯 눈을 반짝였다.


"어머~ 저런 멋쟁이가"

중문을 넘어 들어오는 구두가 시멘트로 다진 바닥에 부딪혀 또각또각 소리를 냈다.


"안녕하십니까?"

마당 한 가운데서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남자의 팔을 애교스럽게 끌어안으며 풍자가 나란히 섰다.

"엄마, 내가 얘기한 사람이예요"


할머니는 그제야 입술을 앙물고 부비며 눈을 꿈뻑였다.


"들어가요. 언니도 와 있었네"


"그래, 어서 들어와. 올라오세요"

영순이 할머니 곁으로 가 앉는 사이 남자는 지퍼를 내려 부츠를 벗고 정자세로 할머니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경일이라고 합니다"


"응? 아버지가 지금 안 계셔서"


"네. 오늘은 잠깐 인사드리려고 들렀습니다"


"엄마, 우리 회사 사장님이예요"


포마드를 바른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둥글둥글하고 넓적한 이마를 시원해 보이게 했다. 긴장한 듯 아래로 내려간 속눈썹이 눈동자를 가릴 정도로 길었다.


'무슨 남자가 저렇게 끼가 있어 보인담'

영순은 남자의 모습을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재미있다는 듯 킥킥 거렸다.


"사장님? 어쩐지 나이가 좀 들어보이시네요. 노총각이예요?"

"네? 저"


"언니, 초면에 뭐 그런 것부터 물어요?"


"나이 찬 아가씨가 집에 남자를 데려왔는데 그럼 뭘부터 묻니?"


"흥, 아버지는 늦게 오세요?"


"글쎄, 일보러 나가셨는데"


"엄마, 그럼 다음에 아버지 계실 때 다시 인사드리러 올게요. 아휴, 내가 오늘 손님 데리고 온다고 했는데 난처하게"


"왜? 기다렸다가 저녁 먹고가면 되지. 아버지가 그 때까지 안 오시겠니?"


"아냐, 다른 날 인사드려도 되니까. 오늘은 그만 가요"

"응? 그, 그래"


"치? 저 년 멀쩡한 신랑감 데려오는 줄 알았는데, 뭐가 구린 모양이네"

대문간을 넘는 뒷모습을 보며 영순이 중얼거렸다.


"쓸데없는 소리! 허튼 소리 하지마! 행여나. 너도 얼른 가. 집에 가서 식구들 저녁 챙겨라"


서둘러 영순까지 돌려보내고 할머니는 방으로 들어갔다.

털퍼덕 주저앉아

"내 팔자야. 아이고, 아이고, 이를 어째?"

답답함에 주먹으로 바닥을 콩콩 치며 하소연을 하고 두리번거려도 방법이 없다.

"아이고 내 팔자야"


"왜? 왜 또 그러고 있어?"

방문이 벌컥 열리며 자그마한 노인이 들어섰다.


"아니, 아니"


할아버지는 이제 가게를 맡겨놓고 한가롭게 시내로 볼 일을 보러 다녔다. 어렵게 세운 가게도 장사가 그럭저럭 잘되고, 오래 장사하다보니 소고기며 채소도 직접 사러가지 않고 알아서 보내줘서 여러모로 시간이 남았다. 먼지 묻은 옷을 탈탈 털어 옷걸이에 걸어두고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저녁 해야지"


부엌에서는 벌써 저녁상을 차리고 있었다.

"아이고, 웬수같은 것들, 아이고"

마음 같아서는 주저앉아 원망하고 울고 싶었다.

가타부타 뭐라 말은 안했지만 이제 막 화사하게 피어나는 풍자에 비해 열 살 남짓 차이가 나 보이는 남자의 인상이 뭔가 숨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게 무엇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것 같기도 하고, 억지로 떼어놓는다고 해도 흠이 잡힐 것만 같은 둘의 모습에 맨가슴만 치며 화를 쓸어 내렸다.


저녁상을 치우고 밤이 깊어지도록 풍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더는 기다릴 수 없어 반짇고리 뚜껑을 덮고 일어서는 데 대문 열리는 소리가 삐거덕하고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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