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이 은은한 밤
"허서방...."
"네, 아버님"
"큼.. 술이 독한가 보네"
방 안 가득한 열기에 취기가 더 오르는 듯했다.
흘끗 보니 갑창까지 닫혀 있어 공기가 답답했다.
창을 열고 들어온 시원한 바람에 등줄기를 타고 흐르던 땀이 식었다.
땀이 식으니 금새 으슬으슬해질것만 같았다. 병은은 사창만 닫아 공기가 드나들게 두었다.
사창에 비친 달빛이 은은하게 빛을 냈다. 비단에 놓인 고운 무늬가 도드라져 보였다. 결이 고운 비단 사이로 들어온 달빛이 방안 분위기를 더욱 그윽하게 만들었다.
"허서방, 내 있잖아. 이 집을 지으면서 나무를 고를 때, 단단하게 잘 마른 나무를 찾느라 오래 걸렸거든. 덜 마른 나무로 집을 지으면 터지고 진이 흐르면서 집에 틈이 생긴단 말이야. 해방되고 얼마 안됐으니까 좋은 나무 찾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어. 일본놈들이 산이며 들에서 나는 좋은 것은 다 가져가버렸으니. 홍은동에 산을 깎아서 돌 캐낸 것도 봐. 그렇게 흉측하게 산을 잘라내고 말이야"
"그렇죠"
"그래, 그래도 그 목수가 기둥으로 쓸 나무를 몇 개 말려둔게 있다면서 보여주는데, 대패로 껍질을 쓱쓱 벗겨서 얼마나 문질러 댔는지 반들반들 윤이 나있더라구. 그래서 내가 웃돈을 주고 그 나무로 기둥을 세웠어."
"그래서 집이 튼튼한 거네요. 송진도 굳어서 단단하고"
"그치? 집을 지을 때는 천 년 만 년 살것만 같았는데 해가 지날수록 이 집을 누구한테 물려줘야 하나 생각이 들어. 아들이 있어도 하나는 너무 어리고 하나는 미덥지 않고"
"그래도 큰 처남이 아버님 대를 이어가야죠. 가게일도 착실히 보고 있으니까요"
할아버지는 술잔 대신 시원한 물을 한사발 들이켰다.
"허서방, 허서방은 막내라 섭섭한거 없어?"
"저야,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큰 형님께 모두 맡기셨으니까요. 어머니 돌아가시고 큰 형님 내외가 살림을 많이 돌보셨으니 그에 따를 밖에요 "
"그래, 술이 다 됐나?"
"네, 한 두잔 남았어요. 더 드릴까요?"
"그래 마지막으로 한 잔만 더 하세.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지 몸이 노곤노곤해지네"
뜨듯한 기운이 남아있는 술을 숨을 마시듯 호로록 들이켰다. 입 안에서 뱅글뱅글 돌리니 술향이 콧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허서방. 내가 첫자식은 정말 정성들여 키웠어. 그래 우리 영숙이가 그렇게 음전하게 잘 자라주었지. 그런데 나머지 자식들은 뭐가 잘못 됐는지 알수가 없어. 영순이 얘기 들었지?"
"네, 뭐. 집사람한테"
"사업을 크게 키운다고 하는데, 이 집을 담보로 빌려달라고 하네"
"네?"
병은은 화들짝 놀라 술기운이 달아남을 느꼈다. 사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은근하게 즐기던 마음도 사라져버렸다.
"수완은 좋은 모양이야. 기생 오래비 같은게 마음에 안들어도 내 부족한 자식 보듬고 살아주니 고맙지 뭐."
"그렇더라도 아버님 집을 담보로 하시는 건."
"그렇지? 그래서 고민이야. 오죽하면 그런 부탁을 할까 싶고, 내가 그런걸 잘 모르니, 괜찮다고 하는데 도와줄 수 있을 때 도와줘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아버님. 집 담보로 빌려주셨다가 큰 일 나세요"
"그렇지? 허서방 말이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