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사람들

바람 소리

by 은의 정원

영천골목이 시끄럽게 쫓겨난 영순이네는 얼마 안가 댄스홀을 닫았다.

댄스홀에서 번 돈을 밑천으로 북창동에 사무실을 내고 건설자재를 수입하는 회사를 열었다는 이야기가 할아버지에게도 바람결에 흘러들어왔다.


'쳇, 평양에서 숭실학교를 나왔다는 말이 헛소리는 아니었나 보네'


그렇더라도 그 빤질빤질한 구두같은 얼굴은 영 기생오라비 같다.

댄스홀을 닫고 어엿한 회사를 열었지만 영순이네는 할아버지가 집에 있는 날에는 영천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북창동이나 진고개에 있는 요리집에서 맛있는 음식이나 먹고 마음 편히 얼굴 보자며 할머니를 불러내곤 했다. 할머니는 윤기가 차르르 도는 공단 치마 저고리에 모피로 가장자리를 마감한 숄을 두른 채 골목 안쪽으로 난 뒷 문을 살그머니 열고 집을 나섰다.

"도둑질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이래"

"그럼 가지 마세요"

"아니, 안가긴. 딸내미가 부르는 데 어떻게 안 가아? 그것도 속이 속이 아닐 텐데. 저 망할 놈의 영감쟁이 성질머리 때문에 내가 제 명에 못 산다. 다녀 오마"


할머니는 이제 한 갑이 다 되어 허리를 못 피겠다면서 집안일 하는 사람을 들였다.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거들던 금례를 점잖은 집에 시집 보내고 한동안 집안 살림과 가겟일을 맡아 보았다. 거기다 경환이까지 키웠으니 손마디 저린 것은 물론이고, 한 갑도 되기 전에 허리가 꼬브라지겠다는 말은 헛말이 아니었다.

제법 시집갈 나이 쯤 되는 손이 두툼한 아이를 소개 받아 들였더니 할머니가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살림을 도왔다. 믿거라 하고 잦은 외출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복이다 하면서 한 껏 치장을 하고 집을 나서는 길이다.

이제 할머니 집에는 학교 다니는 정균이와 상업은행에 다니는 풍자만 남았다.

경환이도 돈 잘 버는 아버지를 만나 좋은 집에서 보모가 챙기고 학교를 보내니 할머니는 그 뿐이면 모두 고맙다며 고집쟁이 할아버지가 마음만 열면 모두가 다 편해질 거라고 했다.


왈가닥이지만 공부도 똑 부러지게 하던 풍자가 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상업은행에 취직을 하던 날 할머니는

"저 왈패 같은 것"이라며 쾌활한 막내딸을 나무라던 할아버지한테

"남자로 태어났으면 한 자리 하고도 남았을 것"이라며 보란듯이 큰 소리를 쳤다.


얼굴도 곱상한 풍자가 은행원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선자리가 늘어서고, 집까지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풍자는 연애는 관심없고 일이 재미있다며 제 성격대로 호탕하게 대문 앞에서 기다리는 남자들을 돌려 보냈다.


"저 년, 저 년... 겁도 없이....쯧 쯧"

"어디서 저런 게 나왔냐고? 여기서 나왔수 여기서"라고 할머니가 자기 배를 두드리는 시늉을 하면 정균은 밥을 먹다가 까부라지듯 낄낄대다가 마루 위를 데굴데굴 구르기까지 했다.


"저건 또 왜 저러누?"


"엄마, 아부지. 나 은행 그만 둘까봐요"

"뭐?"


"아니, 요전 날 김대리님이 소개하는데 을지로에서 경리 사원을 뽑는대요. 돈도 은행보다 갑절로 준다고 하고. 시집가면 그만 둘건데 그 전까지 돈이라도 많이 벌면 좋잖아요?"


"그래, 어디 갈 시집이 있냐?"

"아부지, 뭘 그렇게 진지하게 물어봐요? 갈 데가 어디 있겠어요? 선도 한 번 안 봤는데. 그냥 제 나이가 그렇다는 거지요. 오래 다닌다고 해도 몇 년 이지 안 그래요?"


"그렇긴 하지..."


"내일 잠깐 사무실로 와서 면접보라는데 가봐도 되지요? 거기 사장님이 김대리님 학교 선배라서 잘 안대요"

"그래? 그렇게 소개하는 곳이면 괜찮지 않겠어? 안 그래요?"


"흐음."


"저 양반 또 입을 닫았네. 가 봐라. 밑져야 본전이지. 당장 그만두는 것도 아니고 면접 보러 가는 건데 뭘"


"제 말이"


"뭐하는 회산데?"

'캐비넷 만드는 회사래요. 요즘 캐비넷이 불티나게 팔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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