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사람들

by 은의 정원

"크~ 달다"

"아버님 많이 드세요"

"응 응"


처마에 걸어둔 암치포를 화롯불에 구워 결대로 쪽 쪽 찢어 먹는 맛이 짭쪼롬하니 달짝지근하고 담백했다.

파주에 게신 명자 할아버지는 철마다 마차를 끌고 마포나루터에 갔다. 마차에 가득 채운 갖가지 어패류를 좁고 긴 독에 넣어 소금에 절여 두거나 처마 밑에 걸어 꾸둑꾸둑하게 말렸다. 마포 나루터에서 파주가는 길에 명자네 집에 꼭 들려서 장본 것을 어느 만큼 두고 가면 병은도 아버지처럼 처마 밑에 걸어 말려두거나 새우젓 항아리에 소금을 쳐서 절여 두었다.

그렇게 말려둔 생선을 거둬서 장인과 함께 술 상을 두는 것이 병은의 낙이었다.

명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명자네 처마 밑에는 늘 민어나 홍합이 걸려 있었다.

띨이 예뻐서 사위도 예쁜 것은 아닐 테지만 첫째 딸 영숙은 노인의 마음에 꼭 드는 자식이었다. 얌전하고 새침한 것이 손도 야무지고 음전해서 어디 가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딸자식은 집안 살림이나 가르쳐서 시집보내던 시절이었지만, 왜정때도 학교에 보냈고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떠날 때는 함께 따라나서기도 했다. 댕기머리를 늘인 여학생들 사이에서 의관정제하고 찍은 사진을 머리 맡에 놓고 한 번씩 눈길을 주면서 싱긋이 웃는 모습을 병은은 흐믓하게 바라봤다.


"아버님. 이것도 드세요"

대꼬챙이게 꿰어 말린 홍합을 졸여 만든 홍합초가 쫀득하고 달짝지근했다.

"어멈이 이걸 참 잘해요"

"음 음, 맛이 좋네"

"생물보다는 이렇게 꾸둑꾸둑하게 말려서 먹는게 좋죠?"

"그렇지. 뭐든지 시간이 필요한 거야. 급하게 하려고 하면 생각한대로 되지가 않아. 사는 것도 그래. 너무 탄탄대로면 돌아볼 틈이 없거든. 잘 안될 때는 잠깐 쉬었다 가라고 하나보다 해야지."

"네. 요즘은 참 걱정도 없고 그래요"

"그래. 자네도 고생이 많았지"

할아버지는 뜨거운 물이 담긴 함지박에 띄워둔 술잔을 집어 병은 앞에 한 잔을 두고 자신의 빈잔을 채워 물에 띄웠다. 따끈하게 데워진 술이 부드럽게 몸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암, 얼마나 고생이 많았어. 왜놈들 득세할 때는 학도병으로 끌고 간다 하고 전쟁 때는 또. 참"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들킬까 싶어 얼른 술잔을 들이켰다.

병은은 고개를 떨구고 상 끄트머리를 보며 침을 삼켰다.


무릎이 닿을만큼 작은 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두 남자는 울음을 꿀꺽 꿀꺽 삼켰다. 뜨근한 술이 눈물을 왈칵왈칵 만들어내는 모양이었다. 왕방울만한 눈에서 눈물이 뚝 뚝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하얀 벽을 치고 분합문을 치며 방안을 울리는 듯했다.


할아버지는 소맷자락으로 입을 쓱 훔치고 다시 뜨끈한 술잔을 들어 상에 올려두었다.


병은은 고개를 돌려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아버님. 오랜만에 뜨듯한 술 마시니까 좋네요. 허허"

"그러게 말야. 술은 데워먹어야 술술 들어가지. 가서 국 한 그릇 퍼와야겠다"

"어이쿠 제가 가져올게요"

할아버지는 늘 명자 아범을 보며

'저런 아들 하나만 있었으면' 했다.

아들은 아니지만 평생 곁에 두고 볼 사위가 되었으니 그 또한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술 한 잔이 더 먹고 싶어졌다. 뜨끈하게 데운 술을 술술 마시다가 다음날 일어나지도 못하고 요를 등지고 있어야 될 판이었지만 술 상을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할아버지의 몇 안되는 삶의 즐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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