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악재를 넘어온 바람
"엄마~저 왔어요"
골목에 세워둔 트럭에서 내려진 궤짝이 마당으로 옮겨졌다.
"이게 다 뭐니?"
"오는 길에 조금 챙겨 왔어요. 이건 고기, 생선, 사과, 배"
"조금이 뭐니? 이걸 다 어디에 두니? 아이고, 윤기도 좋다. 지하에 둬야 하나? 일단 옮겨 보자"
"식구도 많은데 이까짓것 금방 먹어요"
구두를 가지런히 벗어두고 마루에 올라 앉은 영순이 손가방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냈다.
"아버지는 어디 가셨어요?"
"엄마, 이거 받으세요. 그이가 이번에 일이 잘 됐다고 엄마 아버지 갖다 드리라고 했어요"
"어머나? 뭐가 이렇게 많니? 이런거 챙겨주지 말고 너희들끼리 잘 살면 되지"
"아이, 받으세요. 그리고 우리 조금 이따가 북창동가서 청요리 먹고 와요"
"오늘은 못 가. 풍자가 일찍 들어온다고 하고 나갔다"
"그럼 풍자오면 같이 가요"
"아니, 누굴 데려온다고 했어"
"어머, 만나는 사람이 있어요? 철없이 다니는 줄만 알았더니 연애도 하고 훗 "
마당에 벌여두었던 물건들은 벌써 부엌 안으로 들어가고, 나무궤짝이 한 켠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새로 온 아이가 손이 참 야무지네"
"그치? 마음도 곱고 솜씨도 좋다.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 좀 해"
"그래야 겠네. 우리집에 들어온 아이들은 다 잘 돼서 나간다니까. 금님이도 시집가서 잘 살잖아요"
"우리 금님이는 고생 많이 했지. 학교를 못 보내줘서 내내 미안하고"
"엄마, 그 시절에 밥 먹이고 따뜻하게 재워준 것만 해도 할 만큼 한 거예요. 나는 뭐 학교 길게 다녔어요?"
"너는!"
할머니는 순간 화가 버럭 나는 것을 참았다.
"제 또래 사촌들이 학교 가는 것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거 보면 내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 줄 아니? 니들이 하도 내 정신을 빠트려서 내가 그 아이를 제대로 못 챙겼어"
영순은 뭐라 한 마디를 붙이려다말고 입을 다물었다.
더이상 얘기가 오가면 제 마음도 상하고 어머니 마음도 상하리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과 하나 깎을까요?"
"그러자"
우물물에 박박 씻은 사과가 반들반들 윤을 내며 쟁반에 담겨 있었다.
"아유, 정말 바지런하네. 넌 어디가도 잘 살겠다 얘"
마루에 앉아 사과를 깎는 아이에게 영순은 실없이 말을 걸었다.
부릉부릉 부릉
"에구, 이게 뭔 소리냐?"
요란한 엔진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부릉부릉부릉 부릉 두두두두두
엔진음이 잦아지는가 싶더니 뚝 끊어지며 무거운 나무 대문이 벌컥 열렸다.
"엄마. 저희 왔어요"
"풍자네"
영순은 사과를 내려놓고 호기심에 소곤거렸다.
"엄마아~"
이 집을 드나드는 수많은 여인들의 치맛단만큼이나 밑단의 폭은 넓었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몸에 달라붙어 날씬한 다리와 허리를 강조한 미색 바지에 자주색과 남색이 현란하게 그려진 블라우스는 깡마른 어깨를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숏커트한 머리모양이 세련된 얼굴에 잘 어울렸다. 화려한 옷차림과 세련된 머리모양보다 당당한 자신감이 더욱 돋보이는 풍자는 영천 골목의 명물로 불렸다.
대청마루에 앉아있던 세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대문을 바라봤다.
늘상 보던 화려하고 요란한 풍자의 옷차림과 목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하교하며 무악재를 넘어올 때도 풍자와 함께 무리를 이루던 친구들은 요란스럽게 도로를 메웠다. 여자 아이 이름에 바람 풍자를 넣어서 그렇다며 이름 지은 사람을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진 시절을 보내면서 기죽지 않고 어디서나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다니던 풍자는 드센 기질로 미군이 던져준 간식거리를 쓸어와 동생과 조카들을 챙겼다.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뻐서 서울여상 재학 내내 부대장을 맡았고, 3학년이 되자마자 취업자리가 정해지기도 했다.
"망아지 같은 것"
"왈가닥"
"드세기가 쇠심줄 같다"고 뒷말들을 하긴 했어도 아들만큼 든든한 딸이었다.
그런 풍자가 데려오는 신랑감은 어떤 사람일까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던 어머니였다.
풍자가 위세 등등하게 대문을 넘어 들어오는 사이, 대청 마루에 앉은 세 여인은 침을 꼴깍 삼키며 숨소리를 낮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