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사람들

냉냉이 아저씨

by 은의 정원

고등학생이 된 명희는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했다. 양갈래 머리를 길게 늘여 땋고 하얀 블라우스에 원피스 형태의 잠바스커트로 된 교복을 입었다. 다른 여학교 아이들이 감색 자켓에 통이 넓은 치마를 입고 단발머리를 하는 것과 달리 머리를 길러 땋고 다닐 수 있고 교복 디자인도 독특해서 어딜가나 시선을 끌었다.

동그란 얼굴이 컴퍼스를 대고 그린 것 같다는 친구들의 말처럼 동그란 얼굴에 동그랗고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어린 시절 그대로인 명희였다.

교복도 학교 교정도 마음에 들었지만 집에서 여간 멀어진 것이 아니어서 전차를 타고 버스도 한 번 갈아타야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집에 올 때는 친구들과 함께 안산 고개를 넘어오면 되었지만 아침에는 조금 번거롭더라도 차를 타고 가야 했다.

날씨는 점점 쌀쌀해지는데 엄마는 모직 코트를 딱 한 벌만 사주고는 코트는 언니가 학교 갈 때 입고 가야한다고 했다.


"그런게 어딨어? 그럼 두 벌 사주던지!"


"두 벌을 어떻게 사니? 넌 전차 타고 학교 가니까 무악재 넘어가야 하는 언니가 코트를 입고 가야지"

"흥!"


엄마가 코트는 언니 것이라고 했지만 전차타고 간다고 해도 코트 없이 다니는 것은 추웠다. 게다가 명희네 학교는 코트를 안 입고 다니는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코트 없는 애는 나 뿐일 걸! 우리 학교에는 자가용 타고 오는 애들도 있어!"

명희네 학교 아이들 대부분은 부모가 교수, 목사, 정치인, 연예인이거나 사업가이기도 했고 아이들 대부분이 성적도 우수했다. 시험 성적으로 학교의 등급을 나눴기 때문에 교복과 머리 모양도 눈에 띄는데 성적도 좋아 가히 귀족 여학교라는 별칭을 들을만 했다.

"자가용만 타고 오는 줄 알아? 왕족도 있다구! 코트 없이는 학교 못 가"


"또! 또! 언니한테 양보할 줄 모르고"

엄마는 명희가 고집을 부린다며 야단만 쳐댔다.

명희는 아무리해도 코트 한 벌이 더 생길것 같지 않아 아침 일찍 준비하고 몰래 코트를 입고 등교를 하는 것이었다.

'저 굼뱅이처럼 굼떠갖고 흥! 내가 먼저 입고 가면 되지!'


말도 행동도 느릿느릿한 명자가 세수하고 학교갈 준비를 하는 사이, 옷걸이에 걸어둔 코트를 살그머니 꺼내 입고 조랑말처럼 골목을 달려나오면 그만이다.

전차 정류장에 도착할 즘이면 숨을 고르고 허겁지겁 졸이던 마음을 새침하게 고쳐맸다. 양갈래 머리를 가슴 앞으로 당기고 멀리서 다가오는 전차를 바라봤다.

전차 문이 열리고 우르르 올라타려는데

'아이쿠. 이런. 다음차를 기다릴 수도 없는데...'


명희를 알아본 전차 운전수가 어김없이 인사를 건넨다.

"명희야. 그냥 타. 그냥!"

"아부지 요즘도 술 많이 드시냐?"


"네?"

냉냉이 아저씨다. 아버지의 먼 친척인 아저씨는 차표를 내지 말라고 요란하게 소리치면서 꼭 아버지 술 많이 드시냐고 묻는다. 그래도 오늘은 안부만 묻는 것이 다행이다. 어떤 날은 아이들이 낸 전차표를 한 움큼 집어서 가져가라고 큰 소리를 치기도 한다. 아저씨 깐에는 용돈을 쥐어주는 것이겠지만 또래 아이들 틈에서 명희는 그저 창피하고 화가 날 뿐이었다.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아이들 틈에 묻혀 고개를 수그리는데 눈치도 없는 냉냉이 아저씨는 식구들 근황을 하나씩 묻고 있다.

등줄기에서 땀이 흐르고 모가지가 점점 쪼그라들어 어깨 안으로 파묻힌 것만 같은 모습으로 코트 안에 몸을 숨겼다.

아이들 틈에 섞어 눈에 띄지 않게 내리려는데 냉냉이 아저씨는 눈도 밝다. 어느새 명희를 찾아내서 큰 소리로 외친다.


"학교 잘 다녀와라. 차 조심하고"


고운 빗으로 빗어 땋아내린 머리카락이 땀에 절어 쉰내를 풍기는 것 같았다. 책상에 한 부씩 놓여있는 신문 사설을 읽으면서도 냉냉이 아저씨로 인해 겪은 수모가 사그라들지 않아 깨알같은 글씨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냉냉이 아저씨 때문에 창피한 날이 하루 이틀은 아니었지만 오늘 아침은 언니 몰래 코트를 입고 나와서인지 괜시리 뽐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코트도 예쁜 교복도 길게 땋은 머리카락도 된장독에 엎어진 것만 같았다.


"엄마! 오늘 냉냉이 아저씨가 애들 많은데서 또 아부지 술 많이 드시냐고 묻고! 아이 참. 그 아저씨 왜 그러는 거야? 그런말 좀 하지 말라고 얘기 좀 해요!"


명희는 언니 몰래 입고 간 코트를 아무렇지도 않게 벗어 방 안에 던져 넣었다.


"오늘도 그러셨어? 그이는 왜 그런다니? 애한테"


아침에 겪은 일 때문에 약이 올라 못 견디겠다고 바락바락하는 바람에 코트를 놓친 언니도 여우같은 둘째 딸에게 따끔하게 잔소리하고 싶었던 엄마도 코트 얘기를 슬그머니 집어 넣었다.


"지난번에는 애들 있는데 큰 소리로 부르더니 전차표까지 쥐어 주고! 나 챙피해서 전차 못 타!"


"에휴~ 왜 그런다니?"


"내가 가서 얘기 좀 해야겠네. 형님한테"


"어? 아버지 왜 벌써 오셨어요?"


"으응, 아버지 오늘 병원에 갔다 오셨어"


"왜요?"


"아버지 몸이 안 좋다고 하네"


"좀 쉬면 괜찮겠지. 아버지 술 많이 안 먹는다고 가서 형님한테 얘기하고 와야 겠네. 허허"


"다녀와요. 너무 늦지 말고"


"알았어요"


이전 19화영천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