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재 흘수

일기

by 은의 정원

다락방에 툇마루까지 있는 한옥인 우리집 왼쪽의 미선이 언니네는 한옥은 아니지만 담이 낮아 화단 위에 발판을 딛고 서면 마당에서 해피가 제 새끼들과 노는 모습을 구경할 수도 있었다. 좁은 마당에 빨래를 널고 식구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모습을 보며 누구 하나 인사를 건네줄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오른쪽의 현주네 집은 안방에서 건넌방이 있는 곳 너머라 담을 넘어 볼 수도 없고, 새로 지은 양옥이라 담이 높게 세워져 있었다. 성격이 활달한 현주는 같은 반은 아니지만, 오후마다 자기 집에서 나와 철제 아치로 장식된 우리집 대문 앞에 서서 내 이름을 불렀다.

현주와 함께 화단에 올라서서 미선언니네를 구경하기도 했지만 현주는 자기 집에 가서 놀자고 할 때도 많았다. 현주네 집은 낮에는 일하는 아주머니 말고는 식구들이 아무도 없었다. 늦둥이라 언니 오빠들이 중, 고등학생이었고, 학교에 다니지 않는 큰오빠도 있다고 했다. 부모님은 밤에야 집에 돌아오신다면서 혼자 집에 있는게 무섭고 싫다고 했다.

하루는 현주가 도토리 한 알을 주웠다며 맛있는 요리를 해 먹자고 했다.

"너 요리 할 줄 알아?"

"아니, 해본 적 없는데"

"그럼.... 이거 어떻게 하지? 맛있게 만들어 먹고 싶은데..."

"후라이펜에 볶아서 먹을까? 우리 엄마는 기름 붓고 설탕이랑 간장 뿌려서 요리 하던데"

"그래? 그럼 우리 해보자"


현주는 자기가 하면 분명 맛이 없을 거라며 우리 엄마처럼 요리를 해달라고 했다.

벽과 천정이 나무로 장식된 넓은 거실은 서늘한 기운이 들었다. 아무도 없어서 한기가 더한 모양이라 우리는 얼른 따뜻하고 맛있는 간식으르 먹고 싶었다.

가스불을 켜는것은 현주 몫이었다.

나는 아직 가스불은 켜본 적이 없었다.

가스 불을 켜고 후라이팬에 도토리 한 알을 올려 놓고 식용유를 부었다. 기름이 열을 내고 연기를 내면서 도토리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볶아지는 거지? 맛있는 냄새 나는것 같아"

"간장하고 설탕 넣어 볼까?"


간장과 설탕이 들어가자 도토리가 새까맣게 변하면서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케켁. 매워"

"악! 불 끄자. 다 탄거 같아"

"아이"


새까맣게 변해버린 도토리를 톡톡 두드려 보았다.

"속에는 익은거 아닐까? 속에 잘라볼까?"

"새까매. 너무 딱딱해서... 뭘로 잘라야 돼? 칼은 무서워"

"나도..."

"내가 손으로 껍질 벗겨볼게. 우리가 껍질을 안 벗겨서 안 익은거 아닐까?"


까맣게 탄 껍질을 벗기자 연한 갈색의 도토리 알갱이는 풋내를 풍겼다.

"속은 하나도 안 익었어"

나는 도토리가 껍질에 싸여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자신있게 요리하겠다고 했지만 도토리가 딱딱한 껍질에 싸여져 있다는 것도 모르는 바보가 될까봐 내색하지 않았다.


"우리 그냥 이거 버리자. 못 먹을거 같아"

"그래, 근데 여기 너무 매워. 매운 연기가 꽉 찼어"


나는 순간 겁이 더럭났다. 얼마 전에도 엄마가 잠깐 시장에 간 사이에 동생과 성냥불을 켜보다 카펫에 떨어뜨린 적이 있었다. 어른들은 성냥이 위험하다면 만지지 못하게 했지만, 작은 나무 막대기 끝의 예쁜 분홍색이 지지직 소리를 내며 화르륵 불이 붙는 모양이 너무 예뻐서 엄마가 집을 비운 사이에 성냥불을 붙여보자고 동생과 벼르던 참이었다.

불이 붙자 손에 힘이 빠져 카펫 위에 불 붙은 성냥개비를 떨어뜨렸는데 그만, 카펫에 떨어지면서 불이 꺼지고 말았다. 콩알만큼 탄 자국을 남겼지만 엄마는 우리가 성냥에 불을 붙인줄을 몰랐고 동생과 나는 그 뒤로 왠지 겁이 나서 그런 불장난은 하지 말자고 했다.


새까맣게 탄 도토리를 보고 현주는 50원짜리 동전을 꺼내며

"이것도 볶으면 맛있어 질까?"하고 웃었다.

"동전도 먹을 수 있어?"

"그냥 궁금하잖아"

나는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동전을 볶을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있잖아. 이거 비밀이야. 너만 알고 있어야 돼"

현주는 조심스럽게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한참을 망설이고 고민한 것 같았다.

"있잖아. 우리 아빠 생선 장수야. 엄마도 같이. 생선 가게하셔"


나는 잠시동안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그게 왜 비밀이야?"

"생선장사가 좋은 직업은 아니잖아"

"왜? 너는 이렇게 크고 좋은 집에 살잖아"

"그래? 나는 좀 창피해. 부모님이 생선 장사라도 우리집에서 비린내 안 나지?"

"그럼! 나 너네 아빠 본 적도 있어. 근데 전혀 몰랐는데!"

"다행이다"


"근데 우리 아빠는 너무 무서워. 아빠가 생선장수니까 우리는 공부 열심히 해야한다면서 혼을 많이 내셔"

나는 현주네 아빠를 딱 한 번 봤다. 대공원 잔디처럼 푸르고 넓은 마당에 서 있던 자그마하고 다부진 현주네 아빠는 약간 화가 난듯 항상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주말에 현주랑 놀고 싶어 대문 앞에서 기웃거리면 인사는 받지도 않고,

"현주야"하고 집 안에 대고 소리를 쳤다.


집 안에서 북적대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현주 엄마나 언니, 오빠를 제대로 마주친 적도 없었다.


"우리집 식구들은 모두 바빠. 생선 장사해야 하니까 주말에는 집안이하느라 분주하거든"

현주는 막둥이라 그런지 항상 어른스러운 말투로 이야기 했다.


"놀아도 돼? 아빠한테 혼나는 거 아니야?"

"아니야. 가자"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는 읍내에 잔디가 자라고 동글동글한 향나무가 심어진 현주네 집처럼 예쁜 단독주택에 첫째 고모가 살고 있었다. 집보다 넒은 마당에 다이아몬드 형태가 새겨진 보도블럭이 깔려있고 덩쿨이 올라가가게 만들어놓은 지지대 위에 연녹색의 청포도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마당 안에서 자전거를 타고 전속력을 다해서 달리면 철제 대문에 꽝하고 부딪히는 것이 재미있어 돌아갔다 다시 돌진하길 반복했다.

대문을 쾅쾅 찧을 때마다 할아버지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우리는 자전거를 마당에 내버려두고 청포도 나무 아래 놓은 큰 물통에 들어가서 물놀이를 했다.

첫째 고모는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두었다. 둘 다 얼굴이 하얗고 가냘팠다. 노래하듯 말하는 사투리는 소리가 높지 않고 목소리가 조용조용했다.


"언니야, 언니야"하면서 살갑게 구는 첫째 혜민이는 자주 보지 못해도 갈적마다 세상 둘도 없이 친근하게 대했다.

'언니야, 이거 갖고 놀자. 이것도 먹어 봐, 언니야"

쌍기역, 쌍시옷, 쌍비읍은 있는데 쌍이응은 왜 없는 걸까?

읍니다, 습니다를 겨우 구분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내가 모르는 글자가 있는 걸까?

혜민이가 "언니야"하고 부를 때는 쌍이응이 필요한데 그런 글자를 나만 모르는 건지 헷갈렸지만 내동생이 부드럽게 "언니"하고 부르는 것처럼 혜민이의 "언니야"도 듣기 좋았다.


혜민이네서는 늘 하루 이상 지내지 않았다. 근처 고등학교 수학선생님인 고모부가 매일 출근해야 하셔서 고모는 집을 비울수 없다고 했다. 혜민이와 같이 할아버지 댁에 올라오지 못해 심심하고 서운했었는데, 내일 혜민이와 병아리처럼 솜털같은 노란 머리가 삐쭉삐쭉 솟은 동생 동선이가 다락골에 올라온다고 했다.


산골생활이 슬슬 지겹고 무서워지기 시작했던 참에 우리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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