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디
아랫마을 계곡에서 미화 이모를 만난 이후로 할아버지는 우리를 따라 계곡에 나오지 않으셨다.
할머니 눈을 피해 하루종일 방 안에서 커피 한 잔을 두고 담배를 말고, 종이를 만지작 거리며 붓을 들었지만 글씨를 쓰지는 않고 다시 넣어두곤 했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처럼 할아버지의 글씨도 가늘고 날렵했다.
엄마는 할아버지 글씨가 예쁘다며 글을 써달라고 했는데, 작은 종이 한 장에 한글과 한자가 섞인 글자를 쓰는데 하루가 꼬박 걸렸다.
칸도 줄도 없는 종이에 쓰인 글자는 작지만 섬세하고 날렵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일렬로 조용히 내려쓴 글씨를 모두 읽을 수 없었다. 소중한 보물을 받은 것처럼 종이가 구겨지지 않게 앨범 안에 끼워두었다.
하루가 꼬박 걸려 쓴 글씨를 건넬 때 할아버지는 전처럼 웃지 않았다.
"허허 좋은기라"는 말도 없이 입술은 앙 다물어져 있고, 눈빛은 반짝였다. 웃지 않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낯설어서 멈칫하는 마음으로 그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사실, 다른 때에도 할아버지 얼굴을 한참 바라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초선
할아버지의 다른 이름 때문에 우리 할머니도 덩달아 동네에서
'초선댁'이라고 불렸다.
그 이름에서 풍기는 선선하고 고결한 느낌을 나는 할머니가 늘 내어놓는 넓적하고 건조한 발과 분리시켜 상상했다.
사랑방에서 고결한 선비의 삶을 살아가는 초선과
흰 치마 저고리에 행주치마로 허리를 동여매고 얌전하게 쪽을 진 초선댁의 모습을 떠올렸다.
할머니가 새색시 초선댁이었을 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금처럼 악다구니를 치고 고무신이 잔뜩 벌어질 정도로 발이 넓적하진 않았을까?
종다리를 들고 산으로 올라간 할머니는 진짜 초선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나는 그만 상상하기를 멈추기로 했다.
작은 방문이 벌컥 열리고 종이를 만지작 거리는 할아버지를 향해
"저 놈의 영감탱이. 또 저 지랄이구만. 뭐해요? 일 안해요?!!"
하는 소리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벼루는 왜 만지고 있어? 다 뿌셔진 거 내다 버리지 않고!"
"어허!"
"줄 줄 새는걸 와 끼고 있냐고? 내다 버려뿌라"
"어허!"
초선의 다섯 딸 중 미화는 유난히 다른 아이였나 보다. 다른 고모들과 달리 미화 고모는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지방 어느 도시에서 화장품 가게를 한다고 했다. 계곡에서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기 전 깨끗한 물에서 우리는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계곡에는 이끼가 자랄 틈도 없고 산에서 바로 내려와서 물 비린내도 나지 않았다. 입었던 옷을 벗고 물기를 닦은 후 옷을 갈아입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미화고모는 린스를 손에 펴서 우리 몸에 문지르고 헹구게 한 후 옷을 입혔다.
살결이 보들보들하고 좋은 냄새가 났지만 머리에만 바르는 린스를 몸에 바르는 것이 이상했다.
막내 고모의 다리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짧은 반바지를 입고 딱딱 소리를 내며 껌을 씹는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짙은 쌍꺼풀, 외국인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묘한 매력의 얼굴이 낯설고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엄마는 결혼하기 전 인사하기 위해 할아버지 댁에 갔다고 했다.
하룻밤을 고모들과 함께 보내면서 이불 위로 물 주전자가 날아다니고, 면도칼로 다른 자매의 교복을 찢는 모습도 보았다고 했다.
가느다랗게 눈썹을 그리고 교복이 없어 학교에 못 간다는 미화 고모를 향해 할아버지는 벼루를 던졌다고 했다. 바닥에 떨어져 금이 간 벼루는 노란빛이 나는 나무함에 든 채 먹을 갈지 못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왜 일 안하냐는 말을 할 때만 화를 내었다. 그 많던 재산이 모두 사라진 후에도 일하지 않는 할아버지가 미워서 그런 거라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 말 말고는 할아버지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했다. 허허 웃다가도 금새 차가워지는 얼굴. 천천히 일어나 천정에 닿을 듯한 호리호리한 몸을 일으키면 할머니느 말을 멈추고 방에서 나가버렸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뒷짐을 지고 마당으로 들어서는 할머니는 저녁 드셨냐는 말에는 대답도 안하고, 윗집 아랫집에서 들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들어주는 사람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