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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o Apr 02. 2024

33. 절대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코스타리카 | 그들을 자극하지 마라

성공적인(?) 번지점프 이후 그 여운은 꽤 오랫동안 지속 되었다.

한겨울 이탈리안 그레이하운드 마냥 발발발 떨던 불과 몇 분 전의 내 모습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시 한번 더 뛰고 싶다는 나 스스로에게 다소 무례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더 하지 않은 이유는 다시 뛰어도 바바리안과 같은 함성을 지를 것만 같아서였을 것이다.


이곳 몬테베르데에서의 번지점프의 인상이 강했던 것일까?

사실, 이후 코스타리카에 대한 기억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몬테베르데 다음으로 향한 라포르투나(La Portuna)에는 커다란 화산이 있다.

그곳은 온천이 나온다. (세상에 온천이라니!)

다만, 한국이나 일본처럼 이 온천수를 대중목욕탕과 같은 느낌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온천수가 나오는 야외 수영장 리조트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어쨌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글 수 있는 귀한 기회. 냉큼 그곳으로 갔다.

몇 달 만에 온몸 깊숙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자니 노곤노곤해지면서 그동안의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마음 같아선 때도 밀고 싶었지만, 어글리 한 것은 얼굴만으로도 충분하다.

인성과 국적까지 어글리 코리안으로 있고싶지는 않아서, 때는 밀지 않고 넓은 리조트를 순회하며 각종 풀을 즐겼다.


수도 산호세(San Jose)는 그동안 지나왔던 엘살바도르나 니카라과, 온두라스의 수도보다는 보다 더 현대적이고 큰 느낌이었다. 멕시코시티와 비슷하려나?

그저 며칠 머무르며 동네 구경을 한 그 정도의 기억뿐, 누구를 만났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특별히 기억하는 것이 없다.

아, 딱 하나 인스턴트커피가 맛있었다.



얘는 한국에 수입하고 싶을 정도였다.



산호세 다음엔 푸에르토비에호(Puerto Viejo)라는 카리브해를 끼고 있는 바닷가 마을로 갔다.

마침내. 해먹을 개시했다.

해먹 위에 누워있자니, 카리브해에 반사되어 비춰오는 에메랄드 빛의 파동과 파도소리가 눈과 귀를 즐겁게 해 준다.



전형적인 카리브해의 바닷가 마을. 전형적이란 말은 표준이란 말로도 볼 수 있다.
이것이 신선놀음인가?



이곳에 음악과 맥주가 더해지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이런 단편적인 기억이 대부분인 코스타리카지만, 번지점프만큼 강렬한 또 하나의 기억이 있다.

혹시 이런 가사의 노래를 아는가?


 '라쿠카라차~ 라쿠카라차~' (스포)


라포르투나에서 온천욕을 즐기고 상쾌한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정확하게는 그다음 날 아침.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계속 호스텔의 도미토리로 숙소를 잡아왔다.

여러 개의 2층 침대와 화장실이 딸린 방.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때 숙소는 나 혼자 썼다.

대게 이런 숙소의 화장실은 변기 하나와 세면대 하나 샤워부스 하나 정도가 있는 공간이 대부분인데, 온천수가 나와서인지 이곳 화장실은 드물게 욕조가 있었다.

물론 그 욕조에 물을 받아서 반신욕을 즐길 생각은 단 1초도 해본 적 없다.

(이래 보여도 우리 집안에서는 깔끔 떨기로 유명하다 ㅎ)


그냥 그런 곳임을 알고 아침에 샤워를 하러 들어갔는데..


 '흐헉'

방심하고 있어서, 그래서 진심으로 놀랬다.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스페인어로 La Cucaracha.

영어로 Cockroach.

일어로 ゴキブリ.

한국어로 바퀴벌레. 통칭 바선생님이시다. 심지어 2마리.


한 마리의 바선생님은 그 특유의 긴 더듬이를 열심히 흔들면서 욕조 위 타일에 앉아계셨고, 다른 바선생님은 배를 까뒤집고 누워계셨다. 긴 더듬이의 움직임이 없는 것을 보아하니 이미 사망하신 것 같다.

그들에게도 슬픔이란 감정이 있는 건지, 죽은 바선생님의 곁을 살아있는 바선생님이 지키고 있는 듯했다.


중미의 고온다습한 환경은 생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 바선생님들... 크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럴 리 없겠지만, 왠지 눈이 마주친 것 같다.

바선생님의 무서운 점은 강한 번식력과 예측할 없는 움직임이다.

다행히(?) 지금은 저기 저 멀리 욕조 타일 위에서 더듬이만 열심히 움직이고 있지만, 언제 나에게 달려들지 알 수 없다.

하물며 이곳은 화장실 안. 밀폐된 곳이다.

자칫 잘못해서 나에게 돌진한다면.. 상상하고 싶지 않다.


딜레마에 빠졌다.

체크아웃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빨리 씻고 나갈 준비를 해야 하는데. 괜히 샤워를 하다 바선생님을 자극하면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

(사실 바선생님은 전투력이 매우 낮은 존재이다. 기껏해야 하수구의 병균을 옮기거나 똥을 싸지르는 정도? 그러나 항상 위험이 전투력과 비례하지는 않는다.)


사망한 동료의 곁을 지키려는 자와 샤워를 하려는 자.

그렇게 우리의 대치가 시작되었다.


...

1분 정도 대치가 이뤄졌던 것 같다. 다행히 그동안 바선생님은 별다른 움직임을 취할 기세는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샤워기를 들고 물을 살짝 틀었다.

잠시나마 '가장 뜨거운 물로 온도를 설정한 후 저것들에게 뿌리면 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백악기 때부터 살아남은 녀석들이다. 공룡이 멸종하던 시기에도 살아남았고, 빙하기도 버텨낸 녀석들이다.

기껏해야 인간이 온기를 느낄 정도의 온수로는 죽이긴커녕 치명상도 주지 못할 것 같아 바로 포기했다.


 '최대한 자극하지 말고 후딱 씻고 나가자.'

씻는 내내 바선생님의 더듬이의 미세한 움직임의 변화에만 주의를 기울이며, 최대한 빨리 씻었다.

다행히 다 씻고 나올 때까지도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고, 나는 바로 화장실을 나와 문을 닫았다.

다시 내 손으로 저 문을 열 일은 내 남은 한평생 없을 것이다.


낄끼빠빠.

낄 때 낄 줄 알고 빠질 때 빠질 줄 알아야 한다.

지금은 그 어떤 순간보다 빠질 순간이다.

그들의 처우(?)와 나머지는 다음에 이 숙소를 쓸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체크아웃하는 날 그들을 마주친 게 그나마 조금 다행이었다.


이후 몇 번 더 바선생님과의 에피소드가 있지만 그건 또 그때의 이야기.

다만, 이건 반드시 알아두길 바란다.

세계일주를 한다면,



절대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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