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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 Jul 02. 2024

엄마 난 효녀가 되고 싶지 않아

나는 우리 엄마의 하나밖에 없는 큰 자랑이다.


사람들이 흔하게 이야기하는 '엄. 친. 딸'이라는 표현이 나인 거 같다. 엄마한테 너무 잘해서 엄마의 주변 지인분들은 딸을 참 잘 키운 우리 엄마가 가장 부럽다는 표현을 많이 한다고 한다. 특히 그런 이야기를 듣고 오는 날 이면 우리 엄마의 어깨는 한 없이 더 올라가 있고 나에게 전화가 와서 엄마가 말한다.


" 내가 남편 복은 없어도 자식 복은 있어 "


그러면서 그날 있었던 일을 나에게 설명을 한다.

시간은 오전 11시 또는 오후 3시 그냥 엄마 내킬 때다. 하지만 나는 일할 시간이다. 근데 나는 엄마전화를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고 10분.. 20분.. 들어주고 있다가 힘겹게 이야기한다.


" 엄마 나 지금 바쁜데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 " 하고 전화를 끊고 잠시 숨을 고른다. 이럴 때면 나는 숨쉬기가 조금 힘들어진다. 속으로 10을 거꾸로 세어본다. 그럼 다시 마음이 평안해진다. 그리고 나는 내 일상으로 들어간다.


우리 집은 조금 많이 독특한 가정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기억이란 걸 할 수 있는 나이 때부터 집에서 같이 살지 않았다. 나는 엄마한테 외동딸이라고 들으면서 컸는데 어느 날 오래간만에 집에 온 아버지는 나한테 첫째 딸이라고 하며 나한테 동생이 있다고 하면서 이젠 난 동생 2명이랑 같이 살 거라고 이야기를 했다.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마냥 동생이 생겼다는 기쁨에 아버지를 따라나섰고 그렇게 엄마를 꽤 나 오랫동안 못 봤다. 나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내연녀 그리고 그 자식들 사이에서 천덕꾸러기였고 못난 오리였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무작정 엄마를 찾으러 가겠다고 나갔다가 그 내연녀한테 걸려 알몸으로 맞고 한 겨울에 너네 엄마한테 가라며 내 쫓겼던 적도 있었다. 그 외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행동들을 참 많이 당했다. 아직도 이해 안 가는 행동 중 하나는.. 음식을 안주는 것이다. 너무 음식을 안 줘서 몰래 먹다가 손등을 많이 맞았다. 아무튼 나는 이 집에서 미운오리였고 나까지 키우기 힘들었던 그 여자는 나를 우리 엄마한테 다시 보내자고 했던 거 같다.


아버지가 어느 날부턴가 나를 며칠씩 엄마를 만나게 해 주고 그리고 엄마 집에서 잘 수 있게 해 줬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아버지는 나를 찾으러 안 왔다.


나중에 엄마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엄마는 나를 데려오려고 노력했다는 것 이었었다. 한 겨울에 나를 찾아오려고 한남동까지 찾아왔다가 남편이라는 작자한테 입 안쪽이 다 터지도록 맞아도 또 찾아왔고 그 여자가 던진 유리병에 발가락이 찢어져도 나를 찾으려고 또 왔다는 것이다. 엄마한테 남아있는 흉터는 나를 데려오려고 노렸했던 엄마한테는 상장 같은 노력의 흔적이자 나한테는 나를 반항 못하게 하는 무언가의 족쇄 같은 흔적이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엄마랑 둘이 살게 되었다. 엄마는 나를 키우기 위해 엄마의 모든 걸 헌신했다. 나 또한 엄마의 헌신을 모르지는 않았다. 내 기억의 엄마는 항상 나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으며 나를 위해 억척스러워져야 했고 지금과 다른 그 당시 사회는 우리 엄마를 고립시켰다. 엄마는 돈에 예민해졌고 남들 시선에 굉장히 예민해졌다.  또한 엄마는 여자 혼자서 애 키우니 애가 저 모양 저 꼴이지 라는 말을 안 듣게 하기 위해서 나에게 많은 걸 강요했다. 그중 엄마가 가장 바라는 건 "말 잘 듣는 착한 딸" 이 거였다. 우리 엄마는 우리 딸은 장래희망도 내가 원하는걸 한데! 우리 딸은 이렇게 사춘기여도 나랑만 다니려고 해! 우리 딸은 나 없으면 안 돼! 이 걸 굉장히 즐기셨던 거 같다.


난 아니었다. 난 장래희망도 엄마와 정 반대였다. 하지만 난 말할 수가 없었다. 내가 엄마와 의견이 다르면 또는 엄마 말에 반항을 하면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고 하며 절규를 하며 숨을 헐떡이는 엄마 모습 또는 자식 하나마저 내 말을 안 들어주는데 내가 살아서 뭐 하겠냐며 락스를 가져오는 엄마 모습이 보기 싫었다. 또 내가 남편복도 없는데 자식복이라고 있겠냐 내 팔자가 그렇지 하면서 식탁에서 담배 피우면서 술 마시는 엄마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하다며 스스로 매질하듯 가슴 치는 엄마 모습이 싫어서 나를 숨겼다. 매 번 나는 너 하나만 보고 산다라는 엄마말에 내가 잘해야 엄마가 살 수 있을 거 같았다. 내가 엄마의 생명끈 같았다.


10대 때는 쉬웠다. 그냥 엄마가 하자고 하는 대로만 하면 큰 문제는 없었다. 물론 나도 반항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너무 엄마의 구속이 답답했던 나는 엄마가 없는 시간에 가출을 했다. 하지만 난 엄마가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너무 충격을 받아 죽으면 어떡하지.. 이 생각부터 시작해 불쌍한 우리 엄마 나까지 이러다니 난 정말 나쁘다. 이런 생각이 휩싸여 채 24시간을 못 채우고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만의 가출을 끝냈다.


20대 때는 엄마가 원하는 대로 살았다. 대학도 학과도 엄마가 원하는 곳으로 진학했고 심지어 직업도 엄마가 원하는 직업으로 잠시나마 했다. 하지만 나랑 맞는 직업은 아니었다. 아직도 엄마가 모르는 것 중 하나는 난 엄마가 원하는 직업을 잠깐 했다. 채 1년도 못 채우고 그만뒀다. 나랑은 맞지 않는 길이였다. 하지만 난 지금까지 엄마한테 사실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내가 그 직업을 했을 때, 그리고 엄마가 주변사람들한테 내 딸 직업을 이야기할 때마다 엄마의 그 성취감 가득한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그 회사에 붙고 처음 엄마가 나에게 한말이 "너네 아빠한테 말해야겠다. 내가 널 얼마나 잘 키웠는지 말해야겠다" 이 말이었다. 나한테 잘했다도 아니었다. 난 그냥 엄마의 트로피 같은 존재였다. 엄마는 엄마 혼자서 날 얼마나 잘 키웠는지 보여주고 싶었던 거 같다. 그날 우리 엄마의 휴대전화는 말 그대로 불이 났다. 나는 그날 엄마한테 끝가지 고생했다는 말은 못 들었다.


36살이 된 지금 나의 20대를 생각해 보면 거짓말과 거짓말의 연속된 인생들이었다. 난 엄마한테 실망감을 줄 수 없는 딸이었다. 그때는 엄마한테 엄마 나 잘렸어요. 제가 능력이 없데요라고 말을 하는 순간 엄마의 모든 것이 무너질 거 같았다. 나만 숨기면 된다고 생각했고 나는 거짓된 인생을 살았다. 거짓말은 처음이 어렵지 하다 보면 무뎌졌고 쉬웠다. 어차피 한국도 아니었겠다 딱히 거슬리는 것도 없었다. 처음 맛보는 해방감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의 대가는 너무 크게 왔다. 매월 엄마한테 보내는 생활비는 월급이 달라진 나에게는 점점 버거웠고 그걸 맞추기 위해 나는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또한 잘렸던 회사에서 받을 수 있는 혜택들에 대한 거 역시 내가 내 자비로 부담했어야 했다. 하지만 난 이때도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참 무식하게 하루하루를 버텼다. 이때 엄마는 아직도 내 딸이 한국에 들어온 게 일을 잘려서가 아니라 한국 모 대기업에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받아서 내가 해외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들어온 줄 안다. 엄마.. 실은 저 그때 방세 낼 돈도 없고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서 들어온 거였어요..


30대 중반이 된 지금 나는 여전히 효녀를 졸업하지 못한 딸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 엄마한테 보내지 못하는 원망 섞인 메시지를 적었다 지웠다 한다.


나는 엄마가 엄마 친구들한테 내 자랑하는 게 정말 싫다. 엄마의 그 자랑을 만들기까지 내 속은 썩어 문들어지고 내 지갑은 얇아진다. 하지만 차라리 그 자랑거리를 만들어줘야 내가 편하다. 그렇게 난 오늘도 또 효녀가 되어버렸다.  


내일은 졸업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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