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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그림 Aug 11. 2024

습수/열수/산수와 조선의 의미 및 명칭 유래에 대하여

말라버린 소요수와 습수 열수 산수 위치 찾기


(1) 습수/열수/산수


<조선>이 무슨 뜻이냐 또는 <조선>이 어디에서 유래한 이름이냐는 주제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아래의 기사이다.


《사기집해》


『장안이 말하기를 “조선에는 습수/열수/산수가 있는데 세 물이 합쳐서 열수가 되었다. 낙랑과 조선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따온 이름인 듯하다”라고 하였다.

集解張晏曰 朝鮮有濕水, 洌水, 汕水, 三水合爲洌水, 疑樂浪, 朝鮮取名於此也. 《史記》 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第五十五』


습수/열수/산수


<사기집해>는 이른바 삼가주석 중 하나로서 남송(CE 420 ~ 479) 배인(裴駰)의 사기 주석서이다.

여기서 인용한 '장안'이란 사람은 3세기 위나라 사람이다.


그런데 논리가 좀 이상하다. 보통 어떤 나라가 있으면 "그 나라에 어떤 강이 그 나라 이름을 따서 무슨 강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반대로 "그 나라의 이름은 그 나라의 무슨 강의 이름을 따왔다"라고 하고 있다. 


또한, 습수/열수/산수가 있는데 여기서 이름을 따왔다고 하면 습/열/산이 나라 이름 조선이 되어야 하는데 이 또한 논리가 이상하다.

즉, 습이 조선이 아니고 열이 조선이 아니고 산이 조선이 아니라는 말이다.


급기야는 <동이한국사-이기훈>에서 습열산을 합하여 차이나어로 '스리에산'이니 이게 '조선'이라고 주장하는데, 어색한 논리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참고로 이기훈씨는 차이나어 전공자.)


이 수수께끼는 또 다른 삼가주석인 <사기색은>을 보면 풀릴 듯하다.

(당나라, 사마정, CE 679 ~ 732)


《사기색은》

『살펴보건대 조(朝)의 음은 조(潮)이며, 직과 교의 반절음이다. 선(鮮)의 음은 선(仙)이다. 산수(汕水)가 있음으로써 (조선이라) 이름하였다. 산(汕)의 음은 산(訕)이다. --- (조선은) 조선潮仙 2음이다. 물이름이다.

索隠案 朝音潮, 直驕反. 鮮音仙. 以有汕水, 故名也. 汕一音訕. 《史記》 卷一百一十五, 朝鮮列傳第五十五 --- 索隠潮仙二音水. 『史記』卷六十九, 蘇秦列傳第九』


산수=조선수


좀더 구체적으로 조선의 이름은 <산수>에서 나왔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배인의 글에서 조선은 산수의 이름인 것이다.

(즉, <산수>는 <조선수>의 약칭)


그렇다면 배인의 글이 뭔가 많이 축약되어 설명이 빠졌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는데, 배인의 글에 나오는 <낙랑>도 필시 <습수> 또는 <열수>와 관련되나 이에 대한 연구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겠다.



(2) <현 조백하가 조선하로 불렸다는 기록>


북송(北宋)시대 군사 저작인 <무경총요(武經總要)>에 <조선하>란 이름이 나온다.

북송의 수도는 하남성 개봉이었고, 요나라의 중경은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영성현이다. 

<현 북경>은 요나라의 영토였는데, 남경이라고 불렀다가 나중에 연경으로 고쳐 불렀다.

아무튼 <무경총요>에는 북송에서 요나라의 중경을 가는 경로가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조선하(朝鮮河)>가 등장한다.


《무경총요》

『(연경에서) 동북쪽으로 중경에 이르는데, 북문을 나가서 옛 장성을 지나 망경까지 40리이다.
또 온여하와 대하파를 지나서 50리를 가면 순주(북경시 순의구)에 이른다. 
동북쪽으로 백서하를 지나 70리를 가면 단주(북경시 밀운현)에 이르며, 여기서부터는 점점 산길로 접어든다. 
50리를 가면 금구전에 이르며, 산길로 접어들면 길이 꼬불꼬불하여 리수나 이정표가 없다. 
조선하를 지나 90리를 가면 고북하구에 도달한다.

東北至中京, 出北門, 過古長城, 至望京, 四十里. 又過溫餘河大夏坡五十里至順州. 東北過白嶼河七十里至檀州, 自此漸入山, 五十里至金溝澱. 入山詰曲, 無複里堠. 過朝鮮河九十里, 至古北河口 《武經總要》 前集卷二十二, 燕京州軍十二』


대청광여도 조선하/고북구/북경

연경에서 중경을 가려면 반드시 고북구를 지나야 한다. 

고북구는 화북지방과 내몽골지역을 이어주는 중요한 통로였다.

이 고북구를 가려면 반드시 건너야 하는 강 이름이 <조선하(朝鮮河)>였다.


<무경총요>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하>는 <현 북경>의 북동쪽과 <현 고북구>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하>는 현 하북성 북경유역을 흐르는 <조백하(潮白河)>를 말하는 것이다. 

즉, 오늘날의 조백하는 송나라 때까지 조선하로 불렸다.


<조백하>는 북경시 밀운에서 <조하>와 <백하>가 합쳐져 발해만으로 들어가는 강물로 현재 차이나는 이 <조하>를 막아 밀운수고라는 댐을 만들어 북경시민의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무경총요>는 CE 1044년에 편찬된 관찬 병서이다. 

이때는 <이성계조선>이라는 나라가 존재하지 않던 때이다. 

<이성계조선>이 세워지기 348년 전의 책에 <조선하>라는 강이 등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조선>은 <단군조선>을 칭한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조백하>는 <조하(潮河)>와 <백하(白河)>라는 두 강물이 하류에서 합쳐진 이름인데, 백(白)은 ‘날이 새다’ ‘밝아지다’는 뜻으로 선(鮮)과 통하는 글자이다. 

따라서 <조하(潮河)>가 <조하(朝河)>이고, <백하(白河)>는 <선하(鮮河)>로 두 물이 합쳐서 <조선하(朝鮮河)>가 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김봉렬).


하지만, 뒤에 밝히겠지만, <조하(潮河)>는 <산수(汕水)>이기 때문에, <조하(朝河)>에서 <조하(潮河)>로 바뀌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대 지도 : 백하/조하/북경


(3) <기주협우갈석도>의 <대요수/소요수>가 <현 조백하>


<현 조백하>는 <기주협우갈석도>의 <대요수/소요수>이다.

이는 <기주협우갈석도>+<태백일사의 요서10성 위치>+<고대 해안선 변화의 과학>으로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현 조백하>가 <조선하>라는 결론을 이용하여 앞서의 배인의 글을 연결할 수 있을까?

배인은 습수/열수/산수의 3강이 합쳐져서 한 강이 된다고 했는데, <현 조백하>는 조하/백하의 2강이 합쳐져서 한 강이 된다.

이를 보면 배인의 글과는 연결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기주협우갈석도 : 대요수/소요수


(4) <소요수>가 말라버렸다는 기록


하지만, <소요수>가 말라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흠정고금도서집성》

『진나라 영가 3년(CE 309)에 말라버린 소요수가 또 양평현을 지나 대량수로 들어갔다. 사마선 왕이 요동을 평정하고 공손연을 이 강가에서 참수하였다. - 《欽定古今図書集成 方輿彙編 山川典》 제200권』


이 <소요수>가 <기주협우갈석도>의 <소요수>를 의미한다면, 많은 수수께끼가 풀린다.

즉, <현 조백하>의 본류는 <백하>인데, <기주협우갈석도>에서 <대요수>로 표현된 강이 본류일텐데 지류인 <조하>와 연결시켜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기주협우갈석도>의 <소요수>가 말라버려서 현재 볼 수가 없다면 이 문제점이 해결되는 것이다.

즉, <현 조백하>의 본류인 <백하>가 <대요수>이다. 

여기에 북쪽에서 지류인 <조하>가 합류하는데, <기주협우갈석도> 당시에는 <조하>가 작은 지류라서 생략한다.

대신 현재는 말라서 없어진 <소요수>가 <기주협우갈석도>에 표시되어 있다.


(이런 디테일까지 증명되었다면 <기주협우갈석도>의 신빙성은 더욱 더 올라가는 것이다.)



(5) <사기집해>+<무경총요>+<기주협우갈석도>+<흠정고금도서집성>


이상을 종합하면 드디어 <사기집해>의 수수께끼가 풀릴 수 있다.



<사기집해>의, <산수>는 <현 조하>이고, <열수>는 <현 백하><대요수>이고, <습수>는 <소요수>이다.


<현 조백하>는 북송시대에는 <조선하>로 불렸고, <사기집해>가 인용한 3세기 장안의 시기에는 <열수>로 불렸는데, <열수>의 지류 중 하나인 <산수>는 <조선수>의 약칭이며, 여기에서 <조선>이라는 국명이 나왔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산수>는 <기주협우갈석도> 당시(즉, 우임금 시기)에는 지도에 보이지 않는 작은 강이었고, 3세기 장안의 위나라 시기에는 커져서 <조선수>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소요수>는 <기주협우갈석도> 당시(즉, 우임금 시기)에는 지도에 보이는 큰 강이었고, 3세기 장안의 위나라 시기에도 <습수>로 존재했는데, 장안의 시기와 CE 309년의 사이에 말라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현 북경>은 <고구리 안시성>, <위만이 왕검성>이다.


 <기주협우갈석도>+<태백일사의 요서10성 위치>+<고대 해안선 변화의 과학>으로 <현 북경>을 중심으로 한 <고대요동>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 지역은 바로 단군조선의 <번조선>의 중심지였다.


즉, 갈석산(현 낭아산)의 위치는 <기주협우갈석도>를 통하여 황하 하류에 있는 갈석산(현 낭아산)의 위치와 고대의 해안선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태백일사>의 요서10성 위치를 고대의 해안선에 맞춰 대입해 본 결과로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번조선의 수도 위만의 왕검성, 신지비사의 안덕향, 삼국유사의 안촌홀, 태백일사의 안시성이 현재의 북경이라는 놀라운 결과가 나온 것이다.


태조대왕 요서10성


즉, 고구리 태조대왕은 위만정권이 찬탈한 번조선 강역을 되찾고 다시는 차이나에 빼앗기지 않도록 이 지역에 요서10성을 건설한다.

<고대요동>은 태행산맥 동쪽의 현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남북 450km 동서 100km의 지역이다. 
이 지역은 서로는 2000m 고산준령인 태행산맥이 방어하고 동으로는 발해가 방어하고 북으로는 연산산맥과 동아시아 최고의 철옹성인 수나라의 2,3,4차 침공을 방어해 낸 난공불락의 <요동성>이 방어하고 남으로는 <200리 늪의 요택>이 방어하는 천혜의 군사요충지이다.
적은 군사로도 능히 백만대군을 감당하는데, 설사 여기에 주둔하는 고구리의 수십만 대군은 차이나 제국들에게는 가히 공포 그 자체이다. 
왜냐면 남으로 돌아들어가면 수/당의 수도인 낙양과 장안이 지척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 <고대요동>을 접수한 국가가 동아시아의 패권국이 되는 것이다.
이는 이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고구리/당나라/요나라/금나라/원나라/명나라)


이곳이 바로 <번조선>이었기에, 후일 차이나 민족은 <번조선>의 수도인 <현 북경(왕검성)>의 옆을 흐르는 강인 <현 조백하>를 <조선하>라고 불렀던 것이다.


(7) 마무리


<고대요동>지역은 차이나가 너무 갖고 싶어하고 한민족에게 연고권이 있는 강역임을 숨기고자 하는 지역이다.

사가로서 자존심에 위사를 쓰지는 못하겠고, 설명을 생략하여 축약시키거나, 본말을 전도시켜서 알아보기 힘들게 하는 기사들을 차이나25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위의 배인의 글도 이런 류의 일환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배인의 비문()을 고치면 이렇게 될 것이다.


《배인의 글 수정》

『조선에는 습수/열수/산수가 있는데 세 물이 합쳐서 열수가 되었다. 이 지역은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다. 그래서 <(조)산수>의 이름은 여기서 따온 이름이다.』


또한, <조선>의 의미는 <홍사한은>에 "아침 해가 신선하니 이를 나라 이름으로 했다"는 기록과 <조(아침 朝)>와 <선(작은 산 鮮)>의 뜻을 미루어 "아침 해의 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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