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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구 Nov 05. 2023

필름카메라 갤러리

#1.

미주가 내게 외로움만 남긴 것은 아니었다. 실은 한 달에 한 번도 겨우 꺼내들지만 미주가 남긴 필름카메라는 항상 머리맡에 있었다. 그 덕분에 거의 매일 어떠한 형태의 죄책감과 함께 잠에 들었다. 오늘도 역시 단 한 장의 사진도 찍지 않았구나, 레버를 한 번도 감지 않았구나, 또 너를 잠시 잊었구나.


겨울의 초입에 들어서자 런던에 와 있음을 매 순간 상기시키려는 듯 많은 비가 내렸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2시간 남짓 해가 드는 날이 있다. 겨우 빨래를 끝내고 간단한 집안일을 마치니 그 잠깐의 시간이 찾아왔다. 어느 순간부터 돌아가지 않는 조리개를 방치했으나 오늘은 이것을 꼭 해결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바로 25분 정도만 걸으면 있는 필름카메라 갤러리로 향했다.


그곳은 항상 어두운 전구를 켜두었다. 노출 조정을 위해서는 햇빛의 정도를 고려하는 것이 중요한데 갤러리 안에서는 실내모드로만 조작법을 익힐 수 있도록 해둔 조치라고 했다. 이 말을 해주었던 여자가 오늘도 갤러리를 지키고 있었다.


- 안녕하세요.


조심스럽게 말을 거는 그녀에게 다가섰다. 레버가 고장난 것 같고 오랫동안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았더니 사용방법을 거의 다 잊은 것 같다고 말했다.


- 카메라 잠깐 보여주시겠어요? 이곳에 있는 카메라 중 한 대면 지금 한 시간 정도 사용법 가르쳐드릴 수 있어요.


미주는 1년 전 온라인 중고매장에서 가장 기본적인 일본 브랜드의 필름카메라를 샀다. 미주가 두고가서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카메라는 당연히 이 갤러리에 있을 것이다. 시간이 가능하냐는 그녀의 말에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갤러리 한 가운데 마련된 둥근 원모양의 테이블에 앉았다. 그녀는 종이를 가져와 필기를 해가며 자세하게 조작법을 알려주었다.


-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20분 정도 남는데, 여기 있는 카메라들 한번 둘러보시겠어요?


그녀는 전혀 웃지 않았지만 말에는 늘 웃음기가 가득했다. 미주의 카메라는 물론 나 역시 환대받는다고 느껴졌다. 어디서도 보지 못한 필름카메라들을 둘러보다 한 두어 개 정도 관심이 가는 모델을 살펴보면 그녀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서 작동법을 간단히 알려주었다. 그러나 내가 묻기 전에 먼저 설명하지는 않았다. 친절하게 거리를 두는 그녀에게선 은은한 숲 향과 머스크 향이 섞여서 났다. 그 향이 나를 자극해서였는지 아니면 절대로 먼저 질문하지 않는 내 태도가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갑자기 그녀에게 물었다. 왜 이곳에서 일하세요?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그런 것을 왜 물어보냐는듯 눈살을 잠시 찡그렸다. 아아, 그러니까 제 말은, 왜 디지털카메라가 아니고 필름카메라를 다루는 곳에서 일하시는지. 그게 궁금해서요. 그제야 그녀는 알겠다는듯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웃었다.


- 디지털카메라는 계속 새로운 모델이 나오는데 필름카메라는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아서 좋아요. 시기나 유행을 타지 않는달까요. 재희님은 왜 필름카메라로 사진 찍기 시작하셨어요?


시기나 유행을 타지 않는 것. 그 비슷한 말을 미주의 블로그에서 봤다. 나는 미주의 피사체가 되고 싶어서 카메라에 관심을 가졌다. 쉽게 말하면 미주의 글에 반해서 미주가 사랑하는 필름카메라의 가장 좋은 피사체가 되고 싶기 때문에. 하지만 답은 이런 식으로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냥요.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괜찮은 일 같아서...


- 빛이나 장소에 따라 내가 자꾸 뭔가를 만져야 하고, 그 감각을 찾아야 마음에 드는 사진도 나오고. 자칫하다 초점이 안 맞거나 그늘 밑, 햇빛 바로 아래 정면, 조금 어두울 때를 제대로 구분 못하고 찍으면 엉망이 되기도 하고. 그냥 그런 온갖 경우의 수들이 이 일이 카메라가 아닌 내가 하고 있는 일이라는 걸 알게 해요. 그리고 런던은 맑은 날이 아주 잠깐이니까. 이곳에선 더 필름카메라가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보세요, 벌써 또 구름 끼는 게 곧 비가 오겠네요.


런던이라서 필름카메라가 더 좋다는 그녀의 푸른빛 검정색 머리카락이 빛나고 있었다. 그 빛 때문에 비가 오기 전에 돌아가겠다는 다짐이 보잘것없어졌다. 그녀는 어두운 런던에서 빛을 찾아 나서는 대신 스스로 빛이 되기로 한 사람 같아보였다. 미주가 보고 싶어하던 사람은 그녀와 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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