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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구 Nov 13. 2023

핫소스 한 줄이요

#2.

미주와 나는 런던에서 5년을 함께 살다가 헤어졌다. 이사를 왔던 첫 해에 우리는 안간힘을, 아니 안간힘만 썼다. 미주는 베이글 가게에서 영국 발음을 알아듣지 못해 버벅거리며 점원의 눈치를 봤다. 결국 먹지 못하는 치즈가 들어간 베이글이 나왔다. 모든 것이 어색한 와중에도 공부를 해야만 했고, 그나마 혼자가 아닌 둘이라는 사실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를 계속 새롭게 도전하기만 했다. 그러다보니 그 어떤 것도 쌓이지가 않았다. 쌓이는 것은 오로지 괴로움, 서로에 대한 불신, 원망, 그리움, 불안, 후회, 뱃살과 같은 것들. 새로운 시도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그저 스쳐지나갔다. 우리는 많은 것을 경험했지만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11월 중순 크리스마스 마켓 근처 아이스링크장을 우연히 지나다가 이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스링크장 옆에서는 전쟁 반대 시위가 일어나고 있었다.


잠시 그때를 떠올리고 있으니 그녀가 자리로 돌아왔다. 손에는 작은 접시에 놓인 팽 오 쇼콜라 한 개가 있었다.


- 비가 와서 그런가, 갑자기 단 게 먹고 싶어서. 같이 먹어요.


정중하게 괜찮다고 사양한 뒤 다시 그녀의 얼굴을 봤다. 자꾸 푸른빛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어쩌자고 그녀에게 카페에 가자고 제안한 것일까.


- 보통 저녁엔 어떤 걸 먹어요?


간장에 졸인 생선요리를 주로 먹어요. 쉬운 것에 비해 감칠맛이 좋아서.


.


새로운 도전을 1년동안 거듭하던 미주와 나는 오히려 매일을 허기진 상태로 보냈다. 한국에선 그렇게나 좋아하던 빵과 파스타가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감당할 충분한 양의 에너지를 주지는 못했다. 런던에서 지낸지 2년이 조금 넘어갈 무렵에는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는 음식들을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우리에게 어떠한 형태의 푸른빛이 돌기 시작했다. 3년 정도의 시간에 가까워질 무렵에는 일주일에 한 번 30분 정도 걸으면 있는 작은 독립영화 상영관에 주기적으로 들렀다. 표를 판매하는 직원과 안부를 물으며 일주일의 일상을 정리하는 기분으로. 그 후엔 근처에 있는 한인마트에서 필요한 재료들을 구매했다. 주말에는 좋아하는 서점에 들러 1시간 정도 머물렀다. 3년, 4년이 지나가면서 새로 이사를 갈 준비를 하고, 누군가를 집에 초대하고, 음식과 차를 내어주고, 신문을 정기구독하고, 적은 돈을 특정 단체에 꼬박꼬박 후원하기 시작하고, 짙고 어두컴컴한 런던의 겨울에 적응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 스스로를 겨우 가다듬고 가까운 타자에게 곁을 내어줄 힘이 가까스로 생겼을 무렵에 학위를 얻고 '경력'이랄 것을 쌓아야 할 시기가 되었다. 겨우 그제야 어른이 되었다 이야기할 자신이 조금 생겼고 우리가 가진 푸른빛에 점차 스펙트럼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짙은 푸른빛, 또 어떤 날은 녹색빛이 도는 푸른빛, 가끔은 물을 섞은 것 같은 투명한 푸른빛이.


어느 날엔 타코를 파는 음식점에 들렀다. 원하는 속재료를 골라담고 계산을 하기 전 미주는 핫소스 한 줄이요- 하고 말했다. 조금이요, 적당히요, 두 줄이요, 추천하시는 만큼이요, 도 아니고 늘 한 줄. 미주에게 필요한 변주는 딱 그 정도가 적당했다. 기본적인 것들 사이에 주는 아주 약간의 변화. 그리고 거기에서 찾아오는 잠깐의 쾌락.


- 사진을 배워볼까 해.


나보다 조금 이르게 박사과정을 마무리하고 있던 미주는 한참 새로 일할 자리를 함께 찾아보고 있었다.


- 그리고 이곳을 떠나려고. 바르샤바에 가려고 해.


놀랐지만 그 모습을 숨기려고 애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전히 그 마음을 알았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때 미주는 마지막 숟가락에 남은 음식에 핫소스를 마저 묻혀 입에 넣고 있었다. 꼭꼭 씹어 삼킨 이후에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너를 떠나려고. 우린 이제 충분히 안정적이니까.


.


- 이거요. 선물이니까 가져요. 가지고 계신 카메라랑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그녀가 스트랩을 내밀었다. 빈티지 가게의 색감과 느낌을 담아낸 것 같은 긴 스트랩이었다. 마름모와 사각형을 번갈아 배치해놓은 문양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저 스트랩을 카메라에 달고 목에 걸치면 그 문양이 목을 조를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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