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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구 Dec 17. 2023

여전히 모르겠어

#7.

아주 좋아하는 동시에 존경하지만 내가 하고 싶다거나 해야겠다고 생각은 들지 않는 일들이 있다. 예를 들면 발레리나나 운동선수, 영화감독, 소설가와 같은 직업들이 그렇다. 그들의 업을 사랑하고 그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많아서 주기적으로 공연을 보러 다니고, 경기를 찾아 보고, 영화와 책은 일상에서 멀어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의 업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런 마음은 좀처럼 생겨나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마음이 가는 연구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하는 일도 그랬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아주 좋았고 그녀의 일을 응원했다. 그녀와의 관계에서 지나친 낭만을 기대하거나 기다리는 일에 미숙하지도 않았다. 우리에게 친밀한 거리감이 생겼다고 어느 정도 확신했다. 함께 여행을 다녀온 뒤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무렵의 해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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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부터 독일에서 살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박사를 졸업한 뒤 일할 첫 직장을 잡았기 때문이다. 쉽지는 않았으나 생각한 것보다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무의식 중에 미주를 떠올렸다. 미주 덕분이라는 생각을 해버렸다. 미주가 아니었다면 자주 흔들렸을 중심을 미주 덕분에 계속 부여잡으며 다른 이들보다 조금은 쉽게 원하는 일을 얻을 수 있었다고.

짐을 싸는 일은 금방 마무리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침대 근처에 그대로 놓여있는 카메라가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 여보세요? 어느 정도 짐은 다 싼 것 같아요. 이제야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갑자기 엄청나게 배가 고프네. 밥은 먹었어요?


안 그래도 전화 하려고 했는데. 저도 거의 끝났고 오늘 일찍 잠들기만 하면 될 것 같아요. 잠깐 집으로 올래요? 정신은 좀 없지만 밥 먹을 자리는 있을 것 같아서.

금방 가겠다며 그녀가 전화를 끊었다. 시선 끝에는 여전히 카메라가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대로 방을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일본식 미소 페이스트를 꺼내고 버섯을 볶기 시작했다.

그녀는 식사 후에 먹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화이트 와인을 꺼냈다. 술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오늘은 함께 마시면 좋을 것 같다고도 덧붙였다. 그녀와 파스타를 나누어 먹는 사이 몸도 방도 조금씩 온기로 채워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내게 긴장 대신 온기를 주고 있었다.


그라스에 다녀온 뒤 그녀는 잠시 필름카메라 갤러리를 닫고 이곳저곳 다녀보고 싶다고 말했다. 며칠 뒤 나는 쾰른대학교에서 이메일을 받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같이 독일에서 살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내게 미주의 향이 짙게 남아있어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는 일에 꼭 미주도 동행하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약간의 설렘을 안고 살만한 곳을 알아보기 시작했다는 점만 달랐다.

우리는 2 bedroom flat을 구했다. 5년 전 일을 다른 사람과 반복하는 일이 조금은 더 쉬워졌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 우리는 이사를 하고 짐을 정리했다. 몇 개월 사이에 오랜 시간 함께 했던 머리 맡의 카메라가 없는 채로,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으며 잠에 들었다. 6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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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비겁한 것인지 타협한 것인지 할 수 있는 것을 한 것인지 여전히 모르겠다. 실은 그 누구보다 폭력에 대한 연구가 하고 싶었던 나는 사실 그 이유로 미주에게 끌렸을 것이다. 동시에 결국 그 연구를 벗어나 다른 연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어떤 식으로든 미주의 눈치를 봤을 것이다. 되도록 상황 탓을 하지 않으며 자신의 삶과 아주 맞닿아있는 연구주제를 선택한 용기를 부러워했으니까. 그러나 눈치를 보는 관계는 건강할 수 없으니 그것을 알게 된 미주가 나를 먼저 떠났겠지.


동경하는 마음은 사랑이 될 수 있을까. 미주와 나 사이의 위계는 뭐였을까. 지금 그녀와 나 사이에는 동경과 질투, 부러움과 부끄러움 같은 감정으로 인해 생겨나는 위계가 있을까. 그런 복잡한 마음을 갖게 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와의 새로운 시작을 결심했을까. 미주 역시 그녀를 결국 사랑하게 되었을까.




- 끝 -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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