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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구 Dec 10. 2023

낭만적 일상

#6.

그녀와 나는 잘 구워진 야채요리를 나누어 먹고 뱅쇼를 함께 마셨다. 몸이 노곤해지는 기분이 좋았다. 이런 편안함은 아주 가끔 찾아오는 것임을 알았다. 크리스마스 마켓이나 캐롤, 연인들 사이의 기념일과 같은 것들이 더는 낭만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을 무렵부터 오히려 희소해진 낭만적 순간들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넘겨짚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녀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자신의 사랑관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울퉁불퉁하고 모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무엇을 아주 사랑하는 것은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와중에 겪게 되는 귀찮음, 양가감정, 짜증섞인 마음, 죄책감, 연민과 같은 것을 안고 기꺼이 상대의 필요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면서. 이처럼 애쓰고 싶지 않아질 때 주로 사랑이 끝났음을 느꼈다고 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나는 사랑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는지도 모르겠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그녀가 구매한 향수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그녀와 잘 어울리는 향이었다. 나도 구매한 책을 보여주며 웃었다.


- 웃는 거 처음봐요. 오늘 좋았나봐요.


웃는 나를 보며 그녀도 웃었다. 좋았어요. 오랜만에 확실하게 대답했다. 이후 그녀는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여행은 자주 다니는지, 필름카메라 갤러리 말고 다른 곳에서 일할 생각도 있는지와 같은 일상적인 것들을 물었다. 그녀와 내가 최근 런던에서 보았던 영화가 우연히 일치해서 그에 대한 이야기도 한참을 나누었다. 호텔에 들어와 헤어지는 순간까지 서로에게 영화를 추천해주고, 가져온 책을 바꿔 읽고 내일은 브런치를 함께 먹자고 약속한 뒤 내 방으로 들어왔다.


조용한 적막이 찾아오자 방금 저녁식사에서부터 문을 닫기 전까지의 순간이 천천히 스쳐지나갔다. 그러자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순간을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기대를 걸기 시작하면 그만큼 더 큰 실망이 찾아오겠지. 서서히 멀어지고 다시금 허망해지겠지. 생각이 깊어지기 전에 화장실로 들어가 빠르게 씻고 침대에 누웠다.


.


나는 처음 런던에 왔을 때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의 낭만을 가지고 살았었다. 하지만 그때의 미주에게 그것은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크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여러 부침들 사이에서 가끔씩 찾아오는 편안한 순간들, 잠시동안의 적막, 한 두 시간의 대화와 같은 것들은 그 순간 잘 받아안으면 그만인 것이었다. 미주에게 일상은 낭만일 필요도, 또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랬기 때문에 미주는 그러한 순간들에 최선을 다해 임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삶은 점점 의미를 찾아나서는 것이다가 생각없이 그냥 보내는 일로 바뀌었다. 삶은 무언가를 성취해내는 것이다가 가까운 사람들과 오만가지 감정을 나누면서도 멀어지지 않기 위해 애쓰는 일이 전부가 되어갔다. 삶의 외피는 다소 단순하고 건조해졌지만 그 밀도는 오히려 더 빽빽해졌다. 주변 사람들에게 책임감을 갖게 되는 일은 사랑한다 보고싶다 속삭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주가 동생에게 생활비를 꼬박꼬박 보내는 것은 종종 미주의 일상을 흔들었다. 동생이 폭력에 노출되지는 않았는지, 생활비를 잘 받아 필요한 곳에 쓰며 어느 정도 괜찮은 삶을 꾸리고 있는지 규칙적으로 확인해야했고, 적지 않은 돈을 송금하기 위해서 공부 이외의 것들을 해야했다. 그게 공부에 소홀해지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폭력에 대해 공부하는 것을 업으로 삼기로 한 미주에게 그 폭력에 노출된, 혹은 그럴지도 모를 위험에 상시적으로 처해있는, 그런 동생과의 관계를 포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미주에게 편안하고 낭만적인 순간들은 그 순간에만 최선을 다한 뒤 빠르게 빠져나와야 하는 무엇이었을지 모른다.


미주의 그런 촘촘한 메마름 속에서 나는 자주 낭만을 찾았다. 주로 가만히 기다리려 애썼지만 보채게 되는 일이 잦았고, 그러다 싸우는 날도, 이틀 정도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날도 길어졌다. 나도 미주와 가까이 지내며 미주의 삶을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주의 삶이 조금 덜 건조해진다고 하여, 그런 낭만적인 순간들을 나와 조금 더 나눌 수 있게 된다고 하여, 미주의 일상이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라 믿었다. 나는 미주가 그 정도로 충분히 강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다채로운 푸른빛이 돌기 시작할 무렵 미주가 바르샤바로 떠나겠다고 말한 것은 나에게서 멀어지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안정을 자꾸 무너뜨리려는 나에게서. 그러니 같이 가자고 말도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


아침 일찍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녀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녹색 원피스를 입고 낮은 단화를 신고 작은 가방을 손에 들고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꾸밈없는 찬란함이 느껴졌다. 이곳의 브런치는 영국의 브런치와 많이 달랐다. 기본적으로 좀 더 달고 재료에 신경을 쓴 것이 느껴졌으며 색감이 훨씬 다채로웠다. 내가 이런 순간을 필요로 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남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고 거의 그 정도로 자신의 보여지는 모습에 대해서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사진, 영화, 책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고, 약한 모습이나 고민들을 드러내는 것에 스스럼이 없었다. 화가 나는 일에는 분명히 화를 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그녀의 좋은 점만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미주가 사랑했을 것 같은 사람이다. 나는 결국 미주에게 사랑받지 못했으나 그녀라면 분명 미주가 온 힘을 다해 사랑하는 누군가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라면 미주를 재촉하지 않았을테니까. 시간과 거리를 두고 미주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같이 여행을 다녀오자고 제안했을 사람이니까.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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