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기술공화국 선언'을 읽고
'기술은 중립적이다'라는 말은 이제 아무도 믿지 않는다.
칩 하나, 데이터 한 줄, 코드 한 줄이 전쟁을 멈추게도, 시작하게도 하는 시대다. 2장에서 다루었듯 미국과 중국은 반도체 공급망을 두고 대놓고 칼을 빼들었고, 한국·대만·싱가포르·필리핀의 공장은 군사기지처럼 지도 위에 찍혀 있다. 이 패권의 핵심에는 기술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직면한 진짜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기술을 바라보는 태도’일지 모른다. 기술은 힘인데, 우리는 그 힘을 어떤 ‘기준’도 없이 휘두르려 하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논쟁들을 떠올려 보자.
원전, AI, 군사 드론, 우주 개발, 데이터 규제, 반도체 동맹. 이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하나의 질문이 숨어 있다. “무엇이 옳은가?” 그러나 우리는 그 질문 앞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흔들린다. 왜냐하면 우리의 공론장은 ‘절대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가치관은 다 다르잖아. 옳고 그름이 어디 있어?” 이것이 바로 도덕적 상대주의다. 그리고 이 상대주의가 자리 잡는 순간, 기술 주권은 반드시 무너진다.
왜 그런가?
기술은 이해관계가 걸린 영역이고, 이해관계의 충돌은 결국 선택을 요구한다. 국가 안보, 기술 인프라, 반도체, 국방 AI 같은 문제는 “모든 의견이 다 옳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팔란티어가 말했듯, 의미가 명확히 규정된 환경에서만 AI는 강력한 성과를 낸다. 기준이 있어야 판단이 가능하고, 판단이 있어야 실행이 가능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옳을 수 있다”고만 말하는 문화는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한다. 기술은 앞으로 달려가는데, 정작 우리의 결정 체계는 제자리에서 멈춘다. 그 사이에 패자는 결정된다.
실리콘밸리가 한때 강했던 이유는 혁신 기술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 왜 만들 것인가”라는 명확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부턴가 소비재와 앱 서비스에 몰두하며 본래의 역할을 잃었다. 기술이 공공의 영역에서 물러나자, 국가와 기술의 연결은 끊어졌고, 엔지니어들은 더 이상 안보·우주·국방 같은 ‘위험하고 어려운 문제’로 가지 않았다. 그 결과, 기술은 있는데 기술관(觀)은 사라진 기묘한 진공 상태가 만들어졌다. 이 틈을 원하는 자들이 누구인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한국도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기술 논쟁을 할 때조차 정책이 아니라 감정, 전략이 아니라 선언, 현실이 아니라 도덕적 제스처에 기대곤 한다. “모두를 존중해야 한다”는 말은 듣기 좋지만, 국가 전략과 기술 패권의 세계에서는 ‘모두를 만족시키는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의사결정에는 차갑고 불편한 선 긋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도덕적 상대주의는 그 선 긋기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모두의 의견이 옳다면, 결국 어느 누구의 의견도 힘을 갖지 못한다.
기술 주권은 결국 선택의 문제다.
가치의 우선순위를 세우고, 무엇을 지킬지 합의하며, 나아갈 방향을 결단하는 것. 반도체든, AI든, 데이터든, 드론이든, 우주든 — 기술은 좌표를 잃은 공동체 위에서는 절대 축적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모두가 옳다고 말하는 사회가 정의로운가?”가 아니라
“우리는 어떤 옳음을 선택할 것인가?”라고.
기술에는 윤리가 필요하고, 윤리에는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 없는 선함은 무능이고, 기준 없는 포용은 붕괴다. 도덕적 상대주의로는 결코 기술 주권을 지킬 수 없다. 우리가 택해야 할 길은, 더 많은 감상이 아니라 더 적확한 합의이며, 더 많은 선언이 아니라 더 명확한 결단이다. 그때 비로소 기술은 단순한 산업이 아닌, 미래를 지킬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