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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이 Mar 15. 2024

ep1. 그래 도망치자 서울로.

고향집 앞 풍경 - 사진첩





나는 지방 소도시에서 대략 33년을 살았다.

그곳은 나의 고향으로 해당 지역의 보건소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자랐다.

20살이 되고 대학에 그리고 해외로 어학연수를 떠나게 되면서 보낸 

잠깐의 타지 생활을 제외하곤내내 고향에서 생을 보내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계속 생활하는 건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았다.

지방 소도시의 특성상 어릴 때나 지금이나 주변 환경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고

어딜 가도 늘 내가 아는 곳 내가 아는 길 내가 아는 풍경들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생각하는 고향살이의 가장 큰 메리트는 언제나 주변에 있는 '아는 사람'들의 존재이다.

오래 알고 지내온  동네 친구들이 있어서 언제나 외롭지 않았다.

작은 동네에 모여사는 친구들이 있다는 건 아주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친구들에게 많이 의지하고 인간적인 교류를 자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위의 장점들이 너무 커서였을까 단점을 이야기해 보려니 생각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나를 안온하게 하는 것들이었다.

그저 좋았던 것 같다 나의 고향살이.


하지만 결국 나는 지방살이를 포기하고 서울로 이주하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제 어른이 되고 싶었다.


나는 줄 곳 고향에서 지내면서 엄마의 회사에서 가족들과 함께 일을 하며 살고 있었다.

그 말은 나는 엄마 사업을 도우며 엄마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받는 30대 캥거루족이었다.

물론 일을 하지 않고 돈을 받은 것은 아니었으나, 어찌 됐든 부모에게 돈을 받으며 생활한다는 건 사실이었다.

누군가는 엄마를 돕는 일인데 뭐가 어때?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근데 나는 뭐가 어땠다.


가족은 태어나서 처음 겪게 되는 사회이다.

나는 그 처음의 사회가 나의 사회의 전부였던 것이다.

집이라는 공간과 회사라는 공간의 경계가 없었고 유리 멘탈인 나에겐 정말 최악의 환경이었다.

열심히 일하고 집에 가 힘들었다며 이야기하면 내 편을 들어줄 가족이 없었고,

열심히 일해도 나의 능력을 인정해 줄 상사가 없었다.

엄마 일이니까 딸인 나는  당연히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었고,

힘들어도 가족의 일이니까 언제고 참고 견디고 일해야 했다.


그렇게 7년을 엄마와 일했고

나는 그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은 나의 고향을 떠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야만 이 고리를 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엄마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고향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결심은 오래 걸렸으나 진행은 일사천리였다.

도망쳐는 당연한 듯 서울로 정해졌고 그 이유는 심플했다.

서울은 가장 기회가 많은 도시이고 내가 사랑하는 남자친구가 사는 도시였다.

그냥 나는 서울로 가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내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낯선 서울에서의 생활이 두렵게 느껴 불안한 날과 과

새로운 환경에서 달라질 나만의 삶에 대한 기대감에 설레는 날들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서울이었다.


조금 늦은 나의 독립을 응원하며

지방에서의 나와 서울에서의 나의 변화를 기록하고자 이 글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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