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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봄 Oct 17. 2022

지난 여름날의 기억

여름의 온도

다시 집으로 돌아와 느지막한 오후까지 자고 일어난 지금, 잠깐 꿈을 꾼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제의 일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삼 년 전 혼자 다녀온 여행에서 지독한 외로움을 느낀 이후로 혼자서 여행은 늘 꺼렸던 나지만 이번 여행은 왠지 모르게 두근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는 같이 있는 것보다 홀로 있는 게 더 익숙해지고 사회생활을 하며 누군가를 열심히 씹을 줄도 아는 사람이 되어서일까. 거주지인 부산으로부터 벗어나 낯선 도시 원주로 떠난다는 사실만으로도 해방감을 불러왔다.


361km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곰곰이 생각한 건 순간을 음미하고 봄부터 숨 가쁘게 달려온 나 자신을 돌아보고 다독여 줄 수 있는 여행이 되기. 다시 여름이 된 지금, 한 사람을 생각하며 사계절 동안 간직하고 있던 감정들도 이제는 정말 떠나보낼 준비를 하기였다.


내가 어디로 발을 뻗는지도 모르고 사람들에게 치여 앞만 보고 걸었던 요즈음과 달리 이번에는 목적지로 가는 순간순간을 음미하고 싶었다. 앞만 보고 걷기에는 내가 너무 지쳐 있었고 내게 오래 남는 건 목적지를 도착해서 느끼는 성취가 아니라 순간의 사유들과 다채로운 감정들이라는 걸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한 이후로 일상에 여유가 없어 사유하지 못하고 나를 돌아보지 못한 것을 늘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여유롭게 돌아보고 싶어 계획을 세세하게 짜지 않았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는 보통 플랜 비까지 세우던 나였지만 플랜 비도 없이 덜컥 떠난 여행은 어쩐지 매끄럽게 풀리지가 않았다.


가기로 한 장소들이 문을 닫았고, 먹고 싶었던 음식의 재료가 떨어졌으며 보기로 한 영화를 컨디션 때문에 취소하기로 했다. 여러 계획에 변동이 생긴 것이다. 예전과 같았으면 스트레스를 받으며 발만 동동 굴렸겠지만 여행지에서 만난 나는 어느새 훌쩍 커 있었다. 이런 일에도 의연하게 대처할 정도로 내가 자라 있었다.


당황한 그 순간에도 나는 순간에 드는 내 판단을 존중했고 내가 선택한 일을 그대로 행동에 옮겼다. 그 안에는 자기 믿음과 자기 사랑이 담겨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계획은 와해됐지만 덕분에 목적 없이 순간에 집중하며 더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문 닫은 소품샵 대신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뽑기도 열심히 해 보고, 더워서 가장 가까운 카페로 간다는 게 마침 지역에서 유명한 카페라 맛있는 디저트도 먹을 수 있었다. 내가 멍을 때리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인데도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멍을 때리기도 했다. 혼자 있는 순간이 외롭지 않았고 창가 쪽에 앉아 하늘을 자주 올려다봤다. 이 한적함과 고요가 깨지지 않았으면,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나는 생각했던 것 같다.


모든 게 여유로웠다. 나의 여행에는 여유가 있었다. 내가 다닌 곳은 어딜 가든 자연이 가까이 있었으며 사람이 많지 않아 더 좋았다. 걸음이 빠르지 않으니 중간중간 멈춰 서서 내리쬐는 햇볕의 강렬함을 피부로 느껴 보고,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들을 보며 여름 안에 들어와 있는 감각을 일깨웠다.


살아 있는 느낌. 가슴이 뜨거웠다. 살면서 이토록 내게 온전히 집중해 본 적이 있었을까.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고 낯선 초행길이 나와 함께였기에 친숙했다. 묵직한 안정감과 자유로움은 정말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 아니었을까.


삼 년 전 혼자 떠난 여행에서 느낀 감정이 외로움이었다면 이번 여행은 낯선 여행지에서 여러 상황들을 조우하며 만들어진 풍부한 감정들로 늘 공허했던 속을 채우고 온 느낌이었다. 오롯이 나만을 생각하고 나를 위한 선택을 내리며 내게 집중할 수 있는, 그런 여행.


여행에서 돌아온 지금, 나는 내 생각보다 더 단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무치는 외로움에 자취방에서 홀로 인형을 끌어안고 울었던 밤들, 음악으로나마 감정의 허기짐을 달랬던 밤들을 잘 이겨냈구나 하고. 이번에 다녀온 여행이 '나 혼자여도 괜찮아'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여름 휴가가 끝나고 이제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나는 나와의 거리가 한층 더 가까워졌음을 느낀다. 여름이라는 프레임 아래 낯선 도시에서 뜨거운 감각을 느끼며 걷던 내 모습은 길을 걷다가도 문득 떠올리겠지. 모든 게 무사한 여행이었다, 정말 모든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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