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 오르기
_당근에 롯데타워 올려놔야겠어요.
집에 오랫동안 빨래 걸이로 사용하던 자전거에게 부업(?)을 시켰다. 현대인의 가정에 하나씩 비치되어 있는 실내 자전거의 주업은 빨래걸이 아니던가? 주객이 전도된 것이지만 실내자전거에게 부업의 기능을 선사했다. 목표는 저녁에 300kcal씩 자전거를 타는 것. 이런 목표를 삼은 이유는 최근에 받았던 건강검진에서 고지혈증이 진단되었기 때문이다. 주변 친구들은 '우리 나이대에 고지혈증은 친구처럼 같이 가는 것'이라 자조 섞인 이야기를 했다. 나도 동조하여 낄낄거렸지만 내심 자존심은 상했다. 그 친구에 대한 자존심이 아닌 나이 듦에 의해 대사량이 급감한 몸뚱이에 대한 자존심일 게다. 물론 자존심을 앞세울 만큼 근육질이었거나 몸매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건강만큼은 자신 있었던 과거에 대한 향수는 있었다.
먼지 쌓일 틈이 없이 부업에 충실했던 자전거는 오랜 습기 덕분인지 페달이 빡빡했다. 첫날의 고통으로 오랜 녹이 벗겨지며 자전거는 비명을 질렀고, 나 또한 비명을 질렀다. 터질듯한 장딴지에 이건 아니다 싶어 여기저기 자전거 관절에 기름칠을 했다. 기름이 흐르는 만큼 내 땀방울도 흐른다. 다음날부터는 그나마 수월해졌다. 매일 300kcal이라는 공깃밥 한 그릇을 몸에서 덜어내니 뭔가 마음이 편해졌다. 100그릇만 빼면 혈중의 지방은 모두 연소되지 않을까? 하는 야릇한 기대도 들었다. 10그릇쯤 공깃밥을 비우던 날, 페달을 밟을 때마다 '딱딱' 하는 파열음이 들렸다. 페달 이음세의 유격이 오랜 하중과 반복되는 충돌로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싼걸 사서인가? 이리저리 고쳐보려고 했지만 아이쿠야, 나로 인해 부러져 버렸다. 페달을 교체할 수 없는 일체형 자전거에서 부품이 망가진 것은 개인이 수리할 수 없는 영역으로 넘어간 것을 말한다. AS가 가능할까 싶어 검색했지만 오래전 그 회사는 폐업을 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방치하여 여기저기 삐그덕 거리던 자전거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문득, 운동을 하여 내 몸뚱이를 방치하면 나도 저리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애초에 AS 따위는 되지 않은 인간의 몸뚱이라는 생각에 두려움의 힘인지 새로 자전거를 사기 위해 검색을 시작했다. 신품과 괜찮은 중고를 검색하며 선택의 최우선은 페달 등 가동성이 있는 부품의 호환성에 초점을 맞췄다. 쇼핑은 내 취미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신경 쓰기 싫어서 지름신의 권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신도도 아니었다. 결정하는 데에 한참이 걸릴 듯하여 그때까지 운동을 위해 아파트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운동을 시작한 이 후로 9층인 집까지는 언제나 계단으로 오르던 터라 계단 오르기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을 때였다. 30년 된 아파트의 층수는 15층 밖에 되지 않았다. 지하실에서 올라오면 고작 16층이었지만 얼추 계산했을 때 3번 왕복하면 밥 한 공기를 비워낼 수 있을 걸로 보였다. 막상 시작하니 땀은 비 오듯 쏟아졌고 집에 오기 위해 올랐던 길보다 몇 곱절은 더 힘이 들었다. 한 바퀴를 돌았지만 수 바퀴를 돈듯한 기분이었고 기억마저 왜곡하는 느낌이었다.
며칠의 지옥 구간을 지나니 할만해졌다. 인간이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거기에 더해 집에 와서 체중을 측정했을 때 600그람에서 800그람 정도의 체중이 감소한 게 희열과 성취를 안겨주었다. 묘한 목표 의식이 생겨났다. 4번을 왕복하면 63 빌딩 정도 오르지 않을까? 물론 무릎 보호를 위해 내려올 때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엘리베이터음과 걸음 소리에 주민에게 피해가 갈까 조심스러웠기에 15층, 14층, 13층 등 지하에서 엘리베이터를 대기시키는 층을 달리했다. 한쪽 귀에는 이어폰을 끼우고 오르는 걸음과 고통을 잊게 할 오디오북이나 유튜브를 틀어 놓고 걸어가는 게 일종의 루틴이 되어갔다.
그렇게 루틴으로 오르던 걸음걸음이 편해짐을 느끼는 순간, 좀 더 높은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부르즈 할리파, 세계 최고층이라고 불리는 이 건물의 층수는 163층, 첨탑까지는 209층의 마천루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터질 것 같은 허벅지와 폐는 마천루를 허락지 않았다. 의지의 부족은 가능성을 높여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소하지만 발전적인 목표를 이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우리나라의 최고층을 오르는 것을 목표로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롯데타워 123층이다. 얼추 계산해도 우리 아파트를 7.6번 왕복하면 이룰 수 있는 목표였다. 지금의 딱 두 배라 이를 악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요 며칠 동안의 계단 오르기로 체중도 줄었고 근육도 늘었으며, 계단 오르기에 폐활량도 늘었으리라.
결전의 날이 오고 퇴근 후 한껏 늘어져 있었다. 시작의 두려움과 투정을 온몸이 부리는 느낌이었다. 다시금 정신이 혼미해질 것이 예상되어 더더욱 첫발을 내딛기 어려웠다. 이렇게 있어서 뭐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도에 포기하더라도 다이어트에는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지하로 내려갔다. 첫걸음부터 힘들었다. 다분히 정신적인 고통이 더 큰 상태였다. 한걸음 한걸음 소음이 나지 않게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귓가에는 오디오북이 흘러나와 되도록 오디오북을 읽어주는 TTS의 음성에 집중했다.
네 바퀴를 돌았다고 생각해을 때다. 마음은 네 바퀴였지만 사실 세 바퀴임을 깨달았다. 단기기억 상실이라도 걸린 것처럼 나의 몸과 마음은 사실을 왜곡하기 시작했다. 빨리 끝내고 싶은 갈망이랄까? 이대로라면 분명 어느 시점에 얼마나 올랐는지를 까먹을 듯하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지하로 내려갈 때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다. '3번' 아내는 무슨 말이냐고 물어볼 때, '이대로라면 몇 번을 왕복했는지 몰라 헷갈릴 거 같다'라고 말했다. 개인 메모장에 적어두어도 될 것을 아내에게 보낸 것은 나의 생사를 알리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아직 니 남편 건재하다'는 과시이자 인정욕이었다. '오~' 하는 아내의 말에 힘이 났다. 나의 아내는 남편을 조련할 줄 아는 능력자임을 나도 알고 있기에 이용한 하나의 팁이었다.
사람은 어떤 일을 할 때 동기가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동기는 착수의 동기와 유지의 동기로 구분지어야 한다. 이를 구분치 않고 사용해도 크게 무방하기는 하다. 착수의 동기가 유지의 이유가 되기도 하고 유지의 동기가 반대의 경우를 낳기도 하니까. 계단을 오르겠다고 생각한 동기는 분명 건강이었지만 계속 계단을 오르게 하는 동기로서는 부족했다. 건강해야겠다는 마음은 계단 오르기의 동기로 활용되기에 상대적으로 유약했으니. 물론 아내를 위해 건강해야겠다는 동기, 아내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동기는 아내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비슷하지만 유지의 동기로서 잘 보이고 싶은 수컷의 동기만 한 것은 없다.
어떤 일을 할 때 계기가 필요하다면 본능에 충실한 동기를 마련하는 게 좋다. 인간은 얄팍하고 힘들 때일수록 본능에 가까운 판단을 하게 되니 본능을 자극할 동기가 가장 좋은 것. 나는 고등학교 3학년때부터 공부를 시작하였다. 지금 시대의 입시 제도에서는 어떠할지 모르지만 그때는 1년만이라도 죽어라 공부하면 큰 성취를 얻을 수 있었다. 고3으로 올라가는 어느 날, 치과대학 그룹사운드의 매니저 역할을 했던 누이는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내게 입장권을 몇 장 주었다. 헤비메탈에 빠져있던 때라 신나서 대학교 공연장을 찾았다. 거기서 보이는 의대, 치대생들의 연주는 조악했으나 멋져 보였다. '공부도 잘하는데 음악도 잘해'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없는 시선이 부러웠다. 사내의 동물적 경쟁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로부터 공부를 시작했고, 목표했던 의대 진학은 못했지만 그때의 공부로 내 인생 경로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었다.
지금 이 순간에 하고자 하는 일이 있지만 동기가 없어 한걸음을 떼어 놓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장 원초적인 본능을 깨우는 동기를 생각해 보길 권한다. 시작의 동기로 사용되기도 하고 분명 내재된 게으름을 이겨낼 내면의 짐승이 깨어날 것이다.
한 발짝, 한 발짝 걸어 오름을 반복하며 결국 롯데 타워 높이 이상의 계단 오르기를 끝마쳤다. 137층. 다음 목표인 부르즈 할리파와 근접한 높이였다. 그 목표는 뒤로 미루고 오늘은 롯데타워 완등을 즐기기로 했다. 급하게 큰 목표를 이루면 지속의 동기가 소실되기에. 당분간 체력이 다시 오를 때까지 가볍게 63 빌딩을 등반할 계획이다. 다 쓴 롯데타워는 당근에 올려서 팔아야 하나 하는 흰소리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