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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오 Sep 03. 2023

경주 끝



  저기 떠 있는 해가 모든 걸 망쳤어. 모두들 ‘좋은 아침’이라 인사를 건네지만 나는 그럴 수 없어. 술에서 깨고 싶지 않은데 이른 시간부터 취하면 모두들 나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지. 매몰차게 치는 바람도, 바쁘게 움직이는 저들의 발걸음도 모두 나를 욕하는 것 같아. 해가 질 때까지 떨리는 다리를 멈추질 못해.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고 나서야 술병을 손에 쥐어.

  난 그럴 때가 좋더라. 술병을 움켜쥔 손을 들이밀었을 때 절로 올라가는 고개 위로 보이는 광경. 진한 보랏빛 하늘 위를 촘촘하게 채운 별들. 하릴없이 하늘을 바라보다 입 안에 머금은 술을 삼키고 나면 그것들과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어. 그것들이 유일하게 나를 반겨주는 것 같아. 아, 해는 반대로 고개를 들어 올릴 때마다 내 눈을 부시게 하지. 마치 자기를 보지 말라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술에서 깨어나기 싫어. 저들과 더 가까워지고 싶어. 더 꽉 끌어안고 싶어. 내 몸이 불타 없어지더라도.


  눈을 뜨면 또 똑같은 천장이었다. 몸을 일으켜니 잔뜩 어질러진 바닥과 벽이 눈에 들어왔다. 텅 빈 맥주 캔과 과자 부스러기들을 치워도 결국 해가 지면 생겨나겠지만 우선은 치워두기로 했다. 누가 집에 온다고 한 것도 아니었지만 이부자리를 개켜고 집구석구석 꼼꼼하게 쓸고 닦아내기까지 했다. 그리고 식탁을 정리해 위를 닦아냈다. 내 앞에 식기 하나, 그리고 반대편에 식기 하나를 놓고 의자를 정갈하게 넣어두었다. 마치 누군가 기다리는 것처럼. 술이 덜 깬 것 같았다.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그러나 행동을 멈추지 않고 꾸준히 집 안에 먼지 한 톨 없도록 청소했다.

  휴대전화에서 알람이 울려댔다. 액정 위로는 ‘그날’이란 글자가 떠올랐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알람을 껐다. 어떻게 오늘을 잊을 수 있을까. 아주 오랫동안 계획했고, 아주 오랫동안 오늘만을 기다려왔다. 다시 휴대전화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걸레질을 마저 시작했다. 바닥을 닦아도, 닦아도 걸레에 먼지가 붙어 나왔다. 이제 그만할 법도 했지만 미련이 남은 것인지, 손을 멈출 수 없었다.

  방 안이 깨끗해지고 나서야 소파에 앉을 수 있었다. 몸에 힘을 빼면 등골이 전부 소파에 찰싹 달라붙었다. 티브이를 켜고 화면을 보면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일종의 습관 같은 것이었다. 가끔은 떡 벌린 입 안으로 벌레가 들어가기도, 먼지가 들어가기도 했지만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티브이 속 기상 캐스터는 오늘의 날씨를 줄줄이 읊어댔지만 내 귀에 들어오긴 충분치 않았다. 내 시선은 오롯이 밑으로 빠르게 흘러 지나가는 시사와 경제 자막을 훑어 읽는데 고정되었다. 틈틈이 오른쪽 화면 위에 떠있는 현재 시각을 보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현재 시각이 오전 아홉 시 정각을 가리키자마자 컴퓨터 화면을 켰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던 주식을 전부 팔아 냈다. 이익이던, 손해던 따질 필요 하나 없었다. 그저 모든 걸 제자리에 돌려두는 게 오늘 내가 할 일이니까. 돌아오는 잔액을 확인해 보니 처음 투자했던 돈의 절반도 못 미치는 금액이었다. 후회는 없었다.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으니까. 손가락을 파르르 떨다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수수료를 제외한 모든 금액을 현금으로 인출해 냈다.  오랜 시간 주식 투자를 한 탓인지 나름 돈뭉치가 얇상하진 않았다. 그중 만 원을 꺼내 곧장 목욕탕으로 향했다.

  “싸우나 만 할 거여? ”

  “목욕만 할게요.”

  목욕탕 주인이 좁은 유리 사이로 신발장과 락커 열쇠를 밀어 건넸다. 25번. 나는 25번 락커를 찾아 문을 열고 옷을 차례로 벗어 걸어 넣었다. 열쇠를 발목에 걸치고 잠시 거울을 바라보았다. 덥수룩한 수염, 붕 뜬 머리, 누런 이. 더군다나 살갗에서는 퀴퀴한 땀냄새도 났다. 목욕탕에 오기 전, 옷이라도 한 벌 사고 올걸 후회가 몰려왔지만 이미 옷을 다 벗은 터라 그냥 락커 문을 걸어 잠갔다.

  목욕탕 안은 한산하게 연기 한 점 없었다. 음산하게 바닥을 적신 물기는 그래도 사람이 오갔다는 증거를 남기고 있었다. 우선 샤워기 앞에 서서 머리부터 발 끝까지 물로 적셨다. 충분히 머리카락과 몸이 젖자 비누로 거품을 내 몸 구석구석을 닦아냈다. 살갗에서 풍기던 퀴퀴한 냄새가 점차 사라져 갔다. 그리고 진한 비누냄새가 몸을 감쌌다. 다시 물을 틀었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이 바닥에 닿는 소리는 괜스레 미소를 짓기에 충분했다. 나는 눈을 감고 몸에 묻은 거품을 헹궈내며 물소리를 만끽했다. 어떤 노랫소리 부럽지 않았다. 어쩌면 오늘이 가장 내 인생에서 행복한 날이 되지 않을까. 괜한 기대감에 더 세게 눈을 질끈 감았다.


  떠올랐던 대로 근처 백화점에 가 옷을 하나 골라 담았다. 비록 명품이나 이름이 있는 브랜드 로고가 박힌 옷은 아니었지만 땀을 흡수하거나 냄새를 가려주기엔 충분했다. 틈틈이 주류 코너를 향해 고개가 돌아갔지만 애써 견뎌냈다. 멋진 저녁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마지막으론 이발소에서 덥수룩한 머리카락과 수염을 잘라냈다. 이발사는 내게 십 년은 젊어 보인다는 사탕발린 말로 회원권을 권유했다.

  “괜찮아요. 앞으로 머리 자를 일이 없을 것 같아요.”

  “아아, 머리 기르시려고 그러시구나. 요즘 머리도 잘라가면서 길러야 해요.”

  “그럼 생각해 보고 연락드릴게요.”

  거울을 보니 늘 처량하게 나를 바라보던 객체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정말 20대로 돌아갔다고 해도, 믿을 법했다. 그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게 돈을 썼기 때문이라고. 결국 돈이 없으면 내 나이처럼 보이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또 정리를 해야 할 게 뭐가 있을까. 애초에 번듯한 직장도, 차도, 집도 없었기 때문에 정리하기 번거로운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망설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름 많은 일정들을 해치워 왔지만 아직 해가 지기엔 한참 멀었다. 결국 방금 백화점에서 산 옷을 다시 입고 산책을 하기로 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최고의 저녁식사를 마친 후, 약간의 취기와 함께 보랏빛 밤하늘 아래를 걷는 것이었는데.

  아직 해는 따갑게 살갗을 비추었지만 그래도 진하게 코를 간질이던 풀내음이 점점 옅어진 채였다. 나른한 오후를 틈타 강아지와 산책을 하거나 카페에 도란도란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이 곳곳을 장악하기 딱 좋은 때였다. 나는 미어캣처럼 주변을 살피며 한 걸음씩 발자국을 뗐다. 요란한 자동차 경적 소리나 상인들이 언성을 높이는 소리 하나 없었다. 아무리 뉴스에서 칼부림이나 사고를 언급해대도 저들은 다른 세상의 이야기로 여겨졌다. 어쩌면 좋은 일일지도 몰랐다. 두려움에 떨며 살기에 세상은 한 치 앞도 모르니까.

  귓가를 간질이던 바람이 어느덧 겉옷 앞섶을 파고들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을 주머니에 끼워 넣고 바람을 반겼지만 바람은 더 세차게 들이 받쳤다. 저들은 여전히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남을 흉보기 바빴다. 어쩌면 그들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오늘 최고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할 말이 너무 많지만 이 책 한 권에 모두 담아낼 수 없을 것 같다.


  와인 코르크 마개가 뿅, 소리를 내며 새하얀 김을 내뿜었다. 은은한 포도향이 콧잔등을 간질였다. 와인이 둥근 잔에 담기며 은은했던 향이 더 짙게 올라왔다. 식탁에 앉기 전에 식기를 세팅해 둔 반대쪽 자리에도 와인을 따랐다. 소고기가 알맞게 잘 익었다. 이번엔 프라이팬에서 버터 향이 풍겨져 올라왔다. 나는 고기를 반 잘라 내 앞에 놓인 접시에 하나, 반대쪽 접시에 하나 올려놓았다.

  허전하다. 세련된 식탁도, 번듯이 차려입은 옷도, 고급진 와인도, 단정하게 자른 머리카락도. 접시는 모두 가득 차 있었지만 무언가 텅 비어 있었다. 결국 반대편에 거울을 하나 놓았다. 덕분에 조금은 허전함이 덜어진 듯했다.

  고기와 피클, 마지막으로 와인 한 모금. 접시 바닥이 조금씩 드러날 때마다 점점 내가 그렸던 그림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태주의 11월이란 시가 떠올랐다.


  ‘돌아오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어디선가 서리 맞은 어린 장미 한 송이

  피를 문 입술로 이쪽을 보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


  대부분 시의 마지막 구절, 낮이 조금 더 짧아졌으니 더욱 그대를 사랑한다는 문구에 시선을 두지만 나는 달랐다. 첫 구절, 돌아가자니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엔 차마 아깝다는 게 연신 머릿속을 헤집었다.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나는 너무 많이 와버렸다. 그렇다고 쿨하게 버릴 수 있을까? 그렇지도 못할 것 같다. 때가 되었다. 파랗게 뜬 달이 나를 반겨준다. 잘 자, 나는 거울을 보고 작게 속삭였다. 괜한 멋쩍음에 남은 와인을 전부 털어 넣었지만 시곗바늘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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