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엄마의 눈은 붉었고, 몽환적이었고, 불행했다. 그제야 난 깨달을 수 있었다.
‘불행하다’와 ‘불쌍하다’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설화는 과학자가 꿈이었다. 문득 그녀는 그때 꿈대로 과학자가 됐을지, 다른 일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우리가 살았던 곳을 돌아다니며 설화를 떠올리곤 했다.
나는 여름에 태어나 유하, 설화는 겨울에 태어나 설화였다. 나름 부모님의 성의가 보인 이름이었으나 유독 설화의 이름이 예뻤기에 어릴 적 나는 그녀를 질투했다. 설화는 말끝마다 ‘왜?’라는 말을 뱉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걸 귀찮아했다.
새는 어떻게 하늘을 날아?
티브이를 많이 보면 왜 눈이 나빠져?
그녀가 물음표를 던질 때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아빠는 일일이 그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가끔 어려운 질문을 할 때면 검색을 해서라도 해답을 찾아주었으나,
아이는 어떻게 생기는 거야? 같은 난감한 질문엔 생판 다른 대답을 해주었다.
설화는 파를 싫어했지만, 파뿌리를 물에 담아두면 줄기가 자란다는 것을 학교에서 배우고 난 뒤론 매일 파뿌리가 담긴 컵을 관찰했다. 엄마와 아빠는 그래도 자기가 키운 파는 먹겠지, 싶어 그녀를 내버려 두었지만, 본인 손으로 쑥쑥 키운 파마저 먹으려 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녀의 과학 교실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중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주기율포를 달달달 외우고, 화장실에 들어갈 때마다 만화책 <WHY> 시리즈를 챙겨 들어가 한 시간 정도 뒤에 나오기도 했다. 이제는 내게 질문을 하기보단 한 순리의 원인을 중얼거리며 설명했고, 궁금한 것이 생기면 컴퓨터 앞에 앉아 검색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난 뒤론 토요일 점심은 늘 나의 몫이었다. 눈을 떠 집 안을 돌아다니면 안방 침대 위는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캄캄하게 불이 꺼진 동생 방에서 새근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어느 정도 불을 다룰 줄 알고, 요리를 할 줄 알았기에 부모님은 나와 동생의 점심을 전부 나에게 맡겼다. 요리라고 해봤자 끓여놓은 국과 반찬을 다시 댑히거나, 전자레인지에 무언가를 돌리는 게 전부였지만 나는 매번 양념이냐 무언가를 더 추가해 ’ 나만의 요리‘를 덧붙였다. 고소한 냄새가 집 안을 가득 채울 때면, 설화의 방 문이 열렸다. 그녀는 눈을 비비면서 나와 냉큼 식탁 위에 앉아 점심 식사를 기다렸다.
“엄마 아빠는 오늘도 나갔어? ”
“응. 토요일이잖아.”
설화는 주말 아침 부모님의 부재가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듯했다.
“언제쯤 돌아오려나.”
“매번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제 남은 카레가 걸쭉하게 늘어나는 것을 확인하고 불을 껐다. 진한 강황의 냄새가 콧잔등을 맴돌았다. 때마침 달걀 프라이도 노릇노릇하게 잘 익었다. 탱글탱글한 노른자가 터지지 않고 무사히 접시 위에 안착했다. 완벽한 점심을 보면 늘 그런 생각을 했다. 엄마가 한 번쯤은 칭찬해 줬으면……
엄마와 아빠는 각자 다른 모임으로 향했다. 엄마는 ‘토요일마다 시를 쓰는 사람들의 모임’ 이란 ‘토시모’ , 아빠는 ‘어제 숙취를 토요일에 해장하는 모임‘이란 ’어토해‘라는 모임이었다.
“결국 또 술 마시러 간다는 거 아니야? “
엄마는 인상을 찌푸리며 아빠에게 쏘아붙이듯 말했지만 아빠는 인자한 웃음으로 웃어넘기려고 했다. 나와 엄마는 모임 이름처럼 그저 해장만 하는 모임이라 생각했으나, 그곳은 매번 해장국과 함께 또다시 술을 들었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는 대낮부터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술에 취해 곧장 잠에 들러 갔다. 아빠가 잠에서 깨어날 때면 해는 이미 저물어 캄캄했고, 엄마는 그런 아빠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며 신세를 한탄했다.
“유하야, 너도 언젠가, 내 나이대가 되면 시를 쓸 거야. 눈물을 떨어트리며”
의미심장한 엄마의 속삭임이었다. 그녀의 눈시울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불행한 순간은 언제든지 찾아오기 마련이거든.”
아직 중학생인 내게 그 말은 그저 한탄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최근 들어 엄마가 자주 눈물을 보였다. 갱년기라 하기엔 이르고, 사춘기라 하기엔 너무 늦은 시기였다. 그럼에도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엄마를 보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왜 엄마는 내 인생이 불행하길 바라는 건가.
- 결국 내가 고작 울기를 바라는 건가.
- 엄마는 현재 불행한가?
- 불쌍과 불행은 어떻게 다를까?
- 나의 미래는 암울한가?
-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건 부자가 아니기 때문인가.
- 부자들은 행복한가?
나의 꿈은 부자가 아니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색상의 운동복을 입고 강아지, 아이와 함께 밤산책을 하는 것. 그저 그것이 내 꿈 전부였다.
- 그럼 나의 꿈은 엄마에게서 비롯되는 건가.
엄마는 코를 훌쩍였다. 엄마에게 시를 보여줄 수 있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예상과 달리 엄마는 선뜻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시는 무척 짧았다. 엄마는 목을 한 번 가다듬고는 시를 읊기 시작했다.
제목, 희미했던 여름. 다시는 없을 삼 초. 일렁이던 햇빛과 귀를 간질이는 바람. 그리고 고독한 나. 나는 죽어간다. 여름과 함께.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엄마가 눈물을 훔쳤다. 나는 그 마지막 문장이 가슴 깊이 박힌 것 같아 다급히 물었다.
“엄마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어디 아프거나 그런 거 아니지? ”
“나는 그저 시를 썼을 뿐이야.”
안방에선 아빠의 코 고는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화장실 변기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Why 책을 들고 간 설화가 볼 일을 다 본 모양이었다. 설화는 눈시울이 불게 달아오른 엄마를 보더니 주섬주섬 책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엄마…… 울어? ”
“응. 언니한테 시를 읊어줬거든.”
“으응…… ”
설화는 과학이 아닌 문학, 인문학 등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엄마가 시를 쓴다고 했을 때도 설화는 시큰둥하게 그래, 하고 넘겼다. 아직은 엄마가 적어도 모임에 나가지 않고 함께 점심 식사를 하길 바라는 듯했다.
“우울한 땐 감자튀김이 좋대. 엄마 나중에 한 번 사 먹어.”
설화가 가볍게 말을 하곤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 그녀는 다시 why 책을 펼칠 것이다. 물에 담근 파뿌리 관찰 일기를 쓰고, 태블릿 PC로 과학 유튜브를 보고. 그녀가 나이를 먹을수록, 과학에 더 깊게 빠질수록 우리의 관계는 멀어져 갔다.
설화가 학교에서 받아 온 포스터를 엄마와 아빠에게 보였다. 나도 호기심에 그녀의 손에 쥐어진 포스터를 힐끗거리며 보았다. 딱 설화가 좋아할 법한 과학 콘서트 포스터였다. 콘서트는 이번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진행되었다. 당연히 설화는 콘서트에 가고 싶다고 졸랐고, 엄마와 아빠는 서로 눈치를 보며 볼멘소리만 내었다. 설화가 들어가고 엄마와 아빠는 식탁 위에 포스터를 올려놓고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았다.
“이번엔 당신이 데려가. 난 이번주에 백일장이 있어.”
“시가 뭐 대수라고 그래. ”
“아니, 여보. 술 한 번 안 마시면 되는 거잖아. 설화를 위해서. 그게 그렇게 어려워? ”
“여보는 잘 몰라서 그래. 거기선 사람들이 술에 취해 금값보다 비싼 정보들을 술술 불어버린다니까? “
엄마는 한숨을 쉬더니 분에 못 이겨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
“설화야, 미안해. 그날 아빠는 일이 있고, 엄마는 운전을 못 해서 일산까지 설화를 데려다 주지 못 해. 우리 다음에 같이 과학 콘서트보다 더 재밌는 곳으로 놀러 가자. 알았지? ”
“으응……”
예상과는 달리 설화는 대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풀이 죽은 그녀의 목소리는 분명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설화는 그날 이후 토요일 아침마다 찾던 엄마와 아빠를 찾지 않기 시작했다. 금요일 저녁마다 모임에 안 나가면 안 되냐는 말도 하지 않았다.
문이 잠기는 횟수는 점점 늘어갔다. 엄마는 모임에 돌아올 때마다 설화의 안부를 물었지만 나조차 그녀의 기분을 헤아릴 수 없었다. 아빠는 설화의 변화를 모르는 듯 끊임없이 모임에 나갔고, 오후가 되면 술에 취해 잠에 들었다.
사건은 토요일 밤에 벌어졌다. 엄마는 ‘토시모’ 백일장을 마친 기념으로 회식을 갔고 열한 시가 넘는 시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소파에 앉아있던 아빠는 벌떡 일어나 팔짱을 낀 채 엄마 앞을 가로막았다.
“향수 새로 샀나 보네.”
엄마는 술에 취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말투가 어눌하게 나왔다.
“응? 아니야. 향수 산 적 없어.”
“그런데 왜 자기한테서 향수 냄새가 진동을 할까? 심지어 이건 남자 향수 냄새잖아.”
엄마는 소매를 들어 올려 옷가지에 밴 냄새를 맡았다.
“아무 냄새도 안 나는걸 뭘 그래.”
“솔직히 말해. 무슨 냄새야 이건.”
설화가 힐끗거리며 엄마와 아빠와 보려 하던 걸 옷가지를 끌어당기며 말렸다.
“모임 강사 선생님이나, 거기 남자 회원분 향수 냄새겠지. 자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민해? “
아빠는 두 주먹을 꽉 쥐다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됐다. 어서 씻고 자. “
아빠가 안방 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문이 굳게 닫힌 걸 확인하고 난 뒤에서야 엄마도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곤 ‘내 팔자야.’ 하고 작게 속삭였다.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엄마의 눈은 붉었고, 몽환적이었고, 불행했다. 그제야 난 깨달을 수 있었다. ‘불행하다’와 ‘불쌍하다’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설화는 받은 용돈을 모두 과학 도구를 사는 데 탕진했다. 아빠에게 소비 습관에 대해 혼쭐이 난 적 있었으나, 그녀를 바로잡기 충분하진 못했다. 아빠의 분노에 기름을 뿌린 건 설화의 방과 후 수업이었다. 설화는 토요일 오전에 하는 ‘과학 실험 방과 후’에 들어간다고 했다. 주말 방과 후 수업은 초등학생 수업이라는 취지와는 어울리지 않게 한 달에 10만 원이라는 큰 금액을 요구했고, 각종 실험 도구들도 따로 구비를 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누가 지 엄마 딸 아니랄까 봐 너도 꼭 주말에 뭘 해야겠니? ”
“아빠도 토요일마다 술 마시러 나가잖아.”
”그럼 우리 다 나가면 네 언니는 집에 혼자 있도록 내버려 두고? “
아빠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 아빠의 눈을 피해 시선을 돌렸다.
“아니 여보, 애가 하고 싶다는데 그냥 좀 해줘. 점심도 제공해 준대잖아. ”
아빠가 눈을 질끈 감곤 한숨을 내뱉었다. 설화는 허락을 받았다는 걸 눈치챈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설화 방과 후 비, 당신이 내 그럼. ”
“나 참. 요즘 돈 얘기만 나오면 왜 그렇게 예민해? ”
아빠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요즘은 시 모임에 나가는 엄마에게도 핀잔을 주지 않았다. 평범한 듯 보이는 일요일 오전은 조용하고, 따스했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폭풍 전 바다는 언제나 고요한 것처럼……. 서로는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하고 있음을.
내게 미션이 하나 더 생겼다. 토요일 오후 두 시가 되면 설화를 데리러 초등학교로 가야 하는 것. 설화도 배웅이나 마중을 나가줘야 할 나이는 훌쩍 지났으나 엄마의 진심 어린 부탁이 느껴져 밖으로 향했다. 토요일 오전은 이제 온전히 나 혼자였다. 학교를 가지도, 모임을 나가지도 않는 온전한 혼자. 엄마는 그런 날 걱정해 준 듯했다.
설화와 각자 피카츄 돈가스를 하나씩 들고 집으로 향하는 길. 놀이터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고, 거리마다 고소한 커피 냄새가 풍겼다. 설화는 피카츄 돈가스 귀 부위를 베어 물며 나를 바라보았다.
“언니.”
“왜? ”
“언니는 엄마, 아빠를 사랑해? ”
사춘기 소녀에게 그 질문은 굉장히 까다로운 질문이었다. 대체로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 란 질문을 받는다면 이것은 두 명을 모두 사랑하는지 묻는 질문이니까.
“그러지 않을까? ”
설화는 그렇구나, 하고 다시 피카츄 돈가스를 먹는데 집중했다.
그날도 한결같이 집으로 돌아온 아빠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보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엄마가 겉옷을 챙겨 입고 거울 앞에 섰다. 나와 설화는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고 진한 향수 냄새를 풍기는 엄마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식탁 위에 올려둔 엄마의 가방 안에 (엄마는 모임 때 들고나가는 가방과 평소에 들고 다니는 가방을 따로 구분해 둔다. 튀어나온 종이 조각이 눈에 밟혔다. 호기심에 종이를 빼내었다. 이번 모임 때 엄마가 쓴 시인 듯했다. 나는 종이를 바로잡고 시를 읽어보았다.
제목, 사라질 것들
찬란하게 흐르던 모든 것들. 그것들은 모두 어디로 흘러가는가
우아하게 일렁이던 모든 것들. 그것들은 아무런 말이 없다
유일했다고 생각한 그것들은
무의미한 존재였던가
이젠 빛을 내는 저 위의 별만이
내겐 유일한 존재구나
너만은 부디 사라지지 말아 주길
설화가 큰 페트병을 들고 학교를 나왔다. 오늘은 물로켓 만들기를 한 모양이었다. 잔뜩 들뜬 설화는 오늘 자기가 만든 물로켓이 얼마나 멀리 날아갔는지 자랑하며 입을 다물질 못했다. 나는 그저 설화가 하는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집으로 향하는 길엔 늘 분식집 골목 모퉁이를 돌아야만 했다. 오늘도 모퉁이를 향해 가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갑작스레 팔에 닭살이 돋았다.
“설화야, 나중에 그거 엄마, 아빠 보여주려면 망가지지 말아야 할 텐데 먼저 집에 가서 고이 모셔둘래? 언니는 잠깐 할 일이 생각나서 조금만 있다가 들어갈게.”
“웅!”
설화는 고개를 세게 한 번 끄덕이더니 곧장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익숙한 목소리는 술에 취한 아빠의 목소리였다. 나는 숨을 죽인 채 사거리 국밥집 골목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빠는 담배를 피우는 듯했다. 아빠의 대화 상대도 후, 하고 담배 연기를 내뱉는 소리를 틈틈이 내었다.
“아니, 오른다고 하셨잖아요. 빚까지 지면서 투자한 거라고요.”
“나도 이럴 줄 알았나? ”
“와이프한텐 뭐라고 말해요. 또 제 애들은? 아직 두 딸이 한참이나 어린데요.”
“안타깝게 됐네. ”
아빠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아빠의 대화 상대는 혀를 끌끌 차며 그런 아빠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는 ‘어토해’ 모임에서 투자 정보를 얻었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은 아빠는 백만 원을 투자했고, 정말로 그 돈은 순식간에 다섯 배나 뛰었다. 결국 아빠는 모임 회원들이 말 한 종목에 전 재산과 마이너스 통장을 하나 개설해 총 삼억을 투자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아빠는 그 돈을 모두 잃었다. 사기를 당한 것이었다. 알고 보니 회원들이 추천한 회사는 존재하지도 않는 회사였고, 아빠에게 거짓 정보를 흘리며 돈을 번 것이었다. 아빠는 당분간 그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와 설화가 나갈 때면 아빠도 모임에 나가는 척하며 나왔다가 혼자 술을 진탕 마시고 돌아온 것이었다.
우선은 아빠와 나만의 비밀로 여기기로 했다. 정확히는 내가 아빠의 비밀을 비밀로 하기로 한 것. 아무리 어렸어도 그것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이 엄마의 귀에 들어간다면 분명 엄마는 이혼 도장을 찍을 거라고.
아빠가 섣불리 엄마한테 핀잔을 주지 않는 이유도 이것이었다. 그럼에도 아빠는 ‘어토해’에 다시 갈려고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부자가 되고 싶어서.’
문득, 엄마가 건넨 말이 떠올랐다. 나도 언젠가 엄마의 나이대가 되면 시를 쓸 거라고.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그 말을 듣고 떠올린 것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결국 부자가 되어야지만 행복한 걸까. 결국 아빠의 욕망은 곧 행복으로 이어지는 걸까. 한참을 고민하다 그냥 등을 돌렸다.
설화와 엄마, 아빠 모두가 모임에 떠난 토요일 오전. 나는 혼자 있었다. 혼자 요리를 해보고, 티브이를 틀어도 삭막한 정적은 쉽사리 떠나질 않았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단순한 호기심에 설화에 방에 들어가 보았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건 벽지에 붙인 주기율표였다. 단순히 20번까지만 외울 줄 알았는데 그 이상의 원소들이 알파벳으로 붙여져 있었다. 책상에는 그녀가 키우는 파와 물로켓, 그리고 도무지 알 수 없는 액체들이 있었다. 액체가 담긴 병에는 ‘위험’이라는 두 글자가 적힌 테이프가 붙여져 있었다. 대충 과학 시간에 배운 염산 비슷한 그런 것 같았다. 옆에는 일기장처럼 생긴 노트가 놓여 있었다. 위에는 ‘실험 일지’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괜스레 주변을 알짱거리다 그녀의 실험 일지를 펼쳐보았다.
20XX 년 6월 4일
파는 무럭무럭 잘 자란다. 그래도 먹을 순 없을 것 같다. 엄마와 아빠는 파를 먹으려고 한다. 지켜야 한다.
20XX 년 6월 6일
주기율포상 같은 족끼린 성질이 비슷하다. 족이 커질수록 성질은 커진다. Li (리튬)보단 Na (나트륨)이 더 반응성이 크다. 얘네들은 물과 반응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20XX 년 9월 14일
물로켓이 멀리 날아가려면 공기 저항을 줄이기 위해 최대한 가늘고 긴 병을 골라야 한다.
20XX 10월 1일
약산은 인체에 무해한 모양이다. 아빠가 멀쩡하다. 다음엔 산이 더 강한 걸 넣어봐야겠다.
10월 1일에 쓴 실험 일지를 보고 곧장 노트를 덮었다. 나도 모르게 온몸에 닭살이 돋아 있었다. 10월 1일이면 몇 주 전 설화가 아빠에게 ‘과학 콘서트’ 포스터를 보여준 날이었다. 그 주 토요일에도 아빠는 술을 마시는 모임에 나갔고, 술에 잔뜩 취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아니, 어쩌면 모임에 간 게 아닐지도 몰랐다.
아빠는 불행하지 않았다. 아빠는 불쌍했다. 엄마는 불쌍하지 않았다. 엄마는 불행했다. 설화는…… 불쌍한 불행에 갇혀 있었다. 설화를 그 안에서 꺼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동시에 나를 위한 것일 수 있다. 나는 침을 크게 한 번 삼켰다.
“뭐? 거기서 진 빚이 3억이라고? ”
역시 엄마의 언성은 높게 올라갔다. 그러나 아빠는 엄마에게 지지 않았다.
“아파트 가격이 올랐잖아.”
“그거 하고 무슨 상관인데.”
엄마는 깊은 한숨을 내뱉더니 이내 등을 돌렸다.
“지친다. 그만하자.”
엄마의 말투는 그전에 비해 차분했다. 그리고 차가웠다. 반면에 이번엔 아빠의 언성이 높아졌다.
“뭐, 너는 그 모임에서 떳떳해? 내가 너 남자 생긴 거 모를 줄 알고? 적어도 바람피우는 것보단 빚을 지는 게 훨씬 낫지.”
“그게 너한테 행복해? ”
“이 여자가 시 쓰더니 말도 이상하게 하네.”
엄마는 더 이상 건넨 말 없다는 듯 소파에 앉았다. 둘이 만들어낸 정적의 무게는 결국 나와 설화의 어깨 위에 올랐다. 과학 만화책을 보던 설화도 책을 덮고 곰곰이 무언가 생각하는 듯했다.
“설화야.”
“응. 언니.”
“우리도 엄마 나이가 되면 시를 쓸까? 아님 빚을 질까? “
“그 무엇도……. 안 하고 싶어.”
설화는 과학자가 꿈이었다. 지금은 그녀가 어떤 과학자가 되었을 진 나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내가 그녀를 방과 후 수업까지 데리러 갔던 길, 그녀의 방에 어질러진 WHY 만화책, 그녀가 키우던 파만이 기억 속 저편에 일렁이고 있었다.
엄마는 ‘토시모’에서 만난 약사와 두 번째 결혼을 치렀다. 아빠는 다시 ‘어토해‘ 모임에 갔다. 설화도 토요일마다 무언가 할지도 모른다. 각기 다른 꿈을 가졌던 셋은 행복했을까. 수 십 번을 되뇌어 고민해 본다.